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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NUMBER_2022下/2022.여름.vol.04

[화양연화]여름 편,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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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마지막 여름

새파란 하늘 위로 소프트콘처럼 떠 오른 적란운, 초록 잎 사이로 눈부시게 부서지는 햇살, 자전거를 탄 학생들이 보여주는 짧은 소매의 하얀 궤적, 처음 일본 문화에 접했던 그날부터 세뇌당한 일본의 여름. 실상을 안 지금도 일본의 여름은 그렇게 남았다. 관념적이고, 낭만적으로.

화양연화의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했지만,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한 2020년 겨울부터 시작된 내 강박증은 나를 갉아먹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잔업과 일본 정부의 어설픈 방역 대책으로 인한 불안감, 기침 및 마스크 착용 등의 매너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보는 피로의 축적은 감정 통제가 힘들어지는 병증으로 이어졌다.

 

과도한 정신력 소모에 심료 내과에 통원한 봄부터 진지하게 퇴직 의사를 회사에 비쳤다. 선배 디자이너에게 '뭐든지 그럭저럭 적당히 한다' 고 '何でも屋'라는 평을 받는 것치고는 나는 꽤 괜찮은 사원이었는지, 갖은 회유로 휴직만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설상가상이라고, 몸과 마음이 아프던 그 시기에 살고 있던 셰어하우스의 계약도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모객 불가를 이유로 반강제적으로 끝이 났다. 꾸역꾸역 쥐어짠 기력으로 포장한 짐은 일단 도내(都内)의 트렁크 룸에 몰아넣고, 휴직 기간 동안 친구들의 집에 신세 지기로 했다.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 나를 가엾이 여겨 줘서 지금의 내가 있다.

 

이번에는 다사다난했던 일본에서의 마지막 여름을, 관념적이고, 낭만적으로 추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고마운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적고자 한다.

 


 

절기상, 여름은 5월 초의 입하부터 8월 초의 입추까지라고 한다. 4월 30일을 마지막으로 셰어하우스를 나온 나는 골든위크 여행을 떠난 친구의 빈 집으로 들어갔다. 도쿄에서 대충 3시간 전후는 전철을 타야 가는 쵸시(銚子)로.

 

일과 코로나바이러스 등 나를 예민하게 만드는 것 투성이인 도쿄로부터 떠나와 '안전한 곳에 있다'는 안도감에 깊이 자고 깨어난 쵸시 도착 다음 날. 아침은 과자로 때우고, 혼자 긴긴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궁리하다 보니 1시간이 지났다. 현대인은 풀 충전된 휴대폰과 이어폰, 지갑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좋아, 일단 바다를 보러 간다. 그렇게 무작정 발길을 옮긴 곳이 쵸시 마리나 해수욕장(銚子マリーナ海水浴場).   

 

 

기껏 잘 자란 야자수도 싸구려 합성 같아 보일 만큼 희끄무레하고 칙칙했던 하늘이, 그날은 어찌나 파랗고 눈부시던지. 넓은 이파리를 드리운 남국의 나무와 짠 바닷바람이, 볼썽사나운 자기 연민으로 끈적거리는 나를 깨끗이 씻어주었다. 바다색은 스틸 블루로 남국의 바다색과는 멀지만, 바람과 파도의 힘으로 바다를 즐기는 윈드 서퍼의 존재만으로도 그냥 여기가 제주도고, 오키나와였으며 몰디브였다.

강아지풀 같은 흰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에,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고, 흥얼거릴 노래가 있는 지금이 감사했다.

 

한동안 식사는 과자였다. 바다를 보며 쉬었더니 식욕이 돌았는지, 제대로 된 걸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칸논(観音)으로 갔다. 일본 내 어획량 1위를 다툰다는 쵸시항(銚子港)까지 왔으니 끝내주는 생선을 먹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도착한 곳은 돈부리야 시치베에(丼屋 七兵衛). 11시 반에 도착해서 20분 정도를 기다린 지역의 맛집이다. 차양도 없는 가게 밖에서 타베로그(食べログ)와 레티(Retty)로 이미지 트레이닝 후, 들어가자마자 바로 주문했다. 극상 고등어 절임 덮밥 정식(極上サバ の漬丼定食)! 극상이라고 해도 고등어가 가장 맛있을 겨울이 지났으니, 기대치는 조금 낮추도록 한다. 인간관계든 음식이든 멋대로 가진 기대치로 상처 주고 상처받는 일은 안타까운 일이니까. 메인인 고등어 절임 덮밥은 얇게 썬 실파, 차조기, 김과 함께 두툼한 고등어 절임이 따뜻한 밥 위에 올려져 있었다. 개인적으로 해산물에는 찬밥을 더 선호하지만, 맛있었다! 좋아하는 고등어와 에도시대부터 유명한 쵸시 간장의 합은 기호를 뛰어넘었다. 

 

만복감에 배를 두들기고 나와 즐겁게 바로 길 건너 엔푸쿠지 이이누마칸논당(円福寺 飯沼観音堂)로 갔다. 경내는 아담하다. 이이누마칸논당에서 가장 좋았던 건 5층 탑인데, 어딘지 센소지(浅草寺)의 5층 탑 같아서 친근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센소지가 도보 40분이면 닿던 동네에 살던 시절, 틈만 나면 갔던 5층 탑이라 그런지 이이누마칸논의 탑의 디테일에 상관없이 그때의 센소지에 있는 것 같아 괜히 사진도 많이 찍었다. 

 


 

하루는, ‘어부의 푸딩’이라고들 하는 치바의 명물, 다테마키스시(伊達巻寿司)를 맛있게 먹기 위해 아침을 걸렀다. 검색하면 원조 스시집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다테마키스시를 내놓는 쵸시의 많은 스시집을 하나하나 구글로 찾다 ‘여성 장인이 스시를 쥔다’는 가게를 발견했다. 스시 타츠(寿司 辰), 다테마키스시의 원조인 오오쿠보(大久保)에서 걸어서 20분 떨어져 있는, 여성 두 분이 운영하는 곳. 골든 위크가 끝난 직후라 온 거리가 스산해서, 노렌이 걸린 문 앞에서 괜스레 눈치를 봤다. 

첫 손님으로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 곳으로 안내받았지만, 주문에서 막혔다. 에세이를 쓰면서 깨달았는데, 나는 '이거다!'라고 정하면 별생각 없이 곧장 움직이는 편인 듯하다. 그래서 가게를 열심히 찾긴 했지만 진짜 '다테마키스시'만 생각하고선 자세하게 무엇을 주문할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를 점주분께 그대로 고했다. 그러자 많이 배고픈지, 싫어하는 재료가 있는지, 반대로 좋아하는 재료가 있는지, 추천할 게 있는데 해도 되는지, 더불어 쵸시의 이야기까지, 도쿄에서는 겪지 못할 대화의 핑퐁 끝에 요리가 나왔다. 성게알, 날치알 같은 어란과 단맛이 도는 해산물, '생선보다 조개가 더 좋다'는 내 취향을 바탕으로 한 다테마키스시 한 판. 소박하지만 나는 좋아 죽는 칸뾰마키(干瓢まき) 3점까지 완벽했다. 피날레로 집은 다테마키스시는 건강과 금전의 문제가 아니라면, 팔뚝만 한 다테마키를 다 얹어낸 큰 스시를 주문했을 것이다. 그만큼 폭신하고 달고, 시원한 다테마키스시가 만족스러웠다.

 

코로나바이러스 방역 대책으로 활짝 열어둔 창에서는 쵸시의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쵸시 여행부터 일본의 방역 대책에 대한 걱정 등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나에게 딱 맞춘 식사와 함께한 이른 점심은 진짜 이치고이치에(一期一会)였음을 이제는 안다.

 

사노야이마가와야키(さのや今川焼き)

홋카이도에서 골든 위크를 보낸 집주인 친구가 돌아와 쥐여 준 기념품에 나도 나름대로 답례하고 싶어서 디저트 겸 사노야이마가와야키(さのや今川焼き) 가게에 들렀다. 일본에선 흔하다면 흔할 이마가와야키지만, 도시에서 만나는 번듯한 이마가와야키와 달리 사노야이마가와야키는 투박한 외형에 터질 듯한 팥소 덩어리가 소탈한 게 특별하다. 평범한 검은 팥앙금과 흰 팥앙금, 둘 다 사서 먹어봤다. 고급 화과자 가게의 단아하게 사라지는 단맛보다는 진한, 그렇다고 먹고 큼큼-하고 목을 가다듬어야 할 진득한 단맛보다는 산뜻한 단맛이 수제 나름의 비장의 맛인지, 완벽한 디저트였다. 한창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있을 친구의 취향이라는 흰 앙금으로, 6개를 사고 자리를 떴다.

 


 

나를 거둬준 쵸시의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새로이 뛰어든 이과의 세계에서도 포기를 선택하지 않은 그녀는 바쁜 게 분명함에도 시간만 나면 나와 함께 했다. 그녀와의 관광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쵸시 전철 1일권 여행. 10개의 역을 누빌 수 있는 쵸시 전철을 타고 가장 먼 곳에서 내려 다시 쵸시 방향으로 거슬러 돌아오는 여행이다.

 

 

살아있는 성게의 모습 (바람소리 주의)

가장 먼 곳인 이누보(犬吠)에서는 살아있는 성게를 만났다. 바위 사이에서 주운 가느다란 미역을 갖다 대자 죽자 살자 물던 성게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깨끗하게 손질된 노란 덩어리가 아니라 살아 삐죽이는 성게에 꽥꽥 소리를 지르던 기억은 청춘이었다. 여러 번 탄 전철 차량 중에는 눈 닿는 모든 곳이 핑크색과 무해한 알파카 인형으로 뒤덮인 <핑크 뉴 진저 호>도 있었다. 신(新) 생강 관련 협업 기획 차량이었는데, 생강과의 연관성은 전혀… 이지만 타는 내내 예쁜 공간의 긍정적 효능을 절절하게 느꼈다. 

 

이이누마칸논당 엔푸쿠지(飯沼観音 円福寺)

쵸시 포트 타워에는 쵸시 전철 1일권으로 전망대 입장료를 약간 할인받아 들어갔다. 올라가서 가장 놀란 것은 흔들림이었다. 파도가 생길 정도의 바람도 아닌데, 횡으로 흔들리는 지반이 굉장히 두려웠다. 

온종일 구름일 거라는 기상청의 일기예보는 역시 예보일 뿐이었다. 거슬러 올라 마지막으로 내린 칸논에서는 게릴라 호우가 내렸다. 그렇지만 엔푸쿠지의 고엔마모리(御縁守り)는 꼭 받고 싶었기에 친구와 나는 무작정 엔푸쿠지의 사무소로 뛰었다. 알고 보니 엔푸쿠지 쪽이 아니라 이이누마칸논당 쪽에서 받아야 했었는데, 과연 부처님을 위해 일하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자비로우셨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인 우리를 위해 일부러 그분들이 이이누마칸논당까지 가셔서 받아다 주셨다. 아마도 안에는 5엔짜리 동전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싶은 작은 부적은 그렇게 내 지갑 안으로 들어와 바다 건너 한국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앞에서 잠시 나왔듯이 쵸시는 간장이 유명하다. 일본간장계의 대기업 5사 중 2사의 공장이 여기에 있고, 나름대로 인지도 높은 B급 구루메로 ‘간장 사이다’를 팔고 있을 정도로(간장 사이다는 콜라 같은 외양으로 콜라로 생각하고 마시면 꽤 괜찮은 맛이다).

어느 날엔가, JR 신주쿠역에서 마루노우치 신주쿠역으로 넘어가는 계단 사이 소바 가게에서 나는 간장 냄새에 갑자기 진절머리가 나서 토기를 억누르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관동(関東) 간장의 본거지서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 도쿄로 돌아가는 날을 맞이하다니... 감개무량하다.

 

다음에 신세 질 친구에게 줄 고급 간장을 사기 위해 쵸시 역 앞 기념품 가게를 돌았다.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면 제품을 죄다 맛 보여 줄 기세로 접객하시는 아주머니 사장님들에겐 도쿄에서 겪는 부대낌의 피로감은 없다. 같이 입을 털며 즐겁게 쇼핑할 뿐. 마음에 드는 패키지와 ‘한정’이라는 이야깃거리를 담은 고급 간장과 기념품, 그리고 결제하며 받은 하이쿠(俳句) 서비스까지, 소소한 데서 오는 이런 멋스러움은 낯설어서 간질간질하다.

 


 

이 간장의 주인인, 도쿄에서 신세 진 친구는 트위터에서 만난 친구인데, 도대체 뭘 믿고 내가 일본을 떠날 때까지의 2개월가량을 머물게 해 줬던 건지, 그 하해와 같은 아량에 고개를 들 수 없다. 도쿄에 돌아옴으로써 또다시 먼지 덩어리 같은 현실과 마주해야 했기에 그녀와의 생활은 날이 서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안한 마음뿐이다.

 

돌아온 도쿄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은 병원에 가야 했다. 다시금 과민해진 터라 ‘될 대로 돼라’, 같은 심정으로 매주 병원으로 향하는 발길은 천근만근이었다. 친구 집에서 역으로 가는 길에는 니시아라이다이시(西新井大師)가 있었다. 사람들의 기원하는 모습, 잠겨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백화요란의 여름꽃을 볼 수 있는 정원, 가끔 들리는 불경 외는 소리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는 늦은 저녁에도 절의 문이 열려있으면 금강역사상 앞에 한 번 멈춰 "다녀왔습니다." 하고 꾸벅였다. 노을 지는 대본당을 향한 길을 똑바로 따라 걷다 일본 정원의 연못의 꽃을 뒤로 경내를 가로질러 나오는 귀갓길은, 병원에서 한껏 마음을 게워낸 나를 달래는 나만의 소확행 루트였다.

 

삼시세끼 복용해야 할 약이 있어 백수였지만 하루 세 번의 식사 하나는 잘 챙겼다. 생활비는 정확히 반반 냈지만 미안한 마음이 커서 요리는 거의 내가 했다. 야매(!) 해산물 덮밥부터 오렌지 치킨까지, 해보고 싶었던 여러 나라의 요리를 했었는데 군말 없이 실험 대상이 되어준 친구에게 감사하다. 훗날 재미있었다고 말해줬지만, 김치를 잘 챙기던 한식 파 친구에게 갑자기 찾아온 세계 요리 대전은 사실 버거웠을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요리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외식도 했었는데, 우에노 마라대학에서 먹은 충칭 마라생선찜(重庆水煮太安鱼)과 금수정이라는 이름의 거대 깨 경단은 잊을 수 없다. 중국인인 후배 디자이너에게 추천받은 요리로, 마라 맛이 얼얼하게 도는 흰 생선찜은 사실 2인분이 넘었다. 이제는 못 먹을, 머슴밥 같던 밥 한 공기를 다 먹게 한 그 맛이 꽤 그립다. 금수정은 진짜 사람 머리만 한 크기로, 건네받는 순간, 점내의 모든 시선이 모이는 대단한 디저트였다. 안에 팥소가 있는 건 아니지만, 구운 호떡 같은 은은한 단맛이 특징으로, 배부른 상태에서도 반 정도는 해치웠다. 남은 것은 다음 날 야매로 만든 더우쟝(豆漿)에 넣어 먹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녀와의 생활이 늘 화기애애하기만 한 것은 아녔다. 나는 인내한 것을 알아주길 바라는 소인배였고, 그녀는 솔직한 사람으로 불편한 점은 바로 이야기하는 타입이었다. 질풍노도의 고등학교 기숙사 3년 이력에도 전에 없을 정도로 빈번하게 말싸움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둘 다 적당히 타협하고 참을 줄 알아서 다행이었고, 그녀가 조금 더 넓은 이해심을 갖고 있어 2개월간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나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여름답게 짧은 비가 그친 뒤 멋진 무지개를 그녀와 함께 본 것, 그녀가 좋아하는 작품에 등장하는 기념 식단을 둘이서 만들어 먹은 것,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방탄소년단의 'Permission to Dance' MV를 같이 감상하고는 그녀가 "우리 집에 와서 네가 가장 밝게 웃는 것 같아 보기 좋다"라고 말해준 것은 함께 해서 좋았던 기억들이다.

 


 

6월 말, 몇 번이고 반려됐던 퇴직 의사가 마법처럼 수리되었다. 얼떨떨한 상태로 7월 중순의 귀국 비행기 티켓을 예매한 그쯤, 귀국 짐도 제대로 못 꾸렸지만, 송별회들이 잡혔다. 임시 거처를 제공해준 친구를 포함한 트위터에서 만난 친구들과 한 송별회와 이 에세이에 자주 등장한 회사 팀장님 댁에서 팀장님 부부, 영업부 후배, 디자이너 동기와 했던 송별회. 먼저 그들이 나의 송별회를 해준다고 했을 때, ‘내가 이 사람들에게 이 정도로 소중했구나’ 싶어 고마움을 넘어 미안함을 느꼈다.

 

 

시기상 더 먼저 열린 것은 트위터 친구들의 송별회였다. 거주지를 제공해 준 친구가 열심히 만든 샹그리아와 한국인의 소울푸드 치킨과 나름 인스타 분위기의 꼬마전구 줄들, <미녀와 야수> 램프 등... 열심히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눈에 비치는 것보다 한참 못 나서 포기한 것이 참으로 아쉽다. 선물도 받았는데, 선물이 문제가 아니라 다들 손 편지를 적어주는 바람에, 진짜 웃고 떠들고 끝낼 것으로 생각한 그날, 질질 울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君と夏の終わり’로 시작하는 ZONE의 <secret base ~君がくれたもの~>가 흘러나오는 편지는 너무 했다. 음대생이었던 그 친구와의 추억과 감성 없이는 100% 글로 전달되지는 않을 나만의 추억이지만, 그 노래의 가사대로 10년 후 8월에 날 울렸던 그 멤버 그대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회사 팀장님 댁에서의 송별회는, 말하자면 일본 생활의 피날레였다. 팀장님은 자주 회사 사람들을 불러서 집에서 만든 요리를 대접하고 서로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하는, 내게는 아주 이상적인 상사였다. 보통 스페셜리스트로 발전하는 디자이너나 엔지니어와 달리, 나는 디자이너, 엔지니어, 영상 편집 등 스페셜해야 할 부문의 제너럴리스트로 성장하는 바람에 많은 방황을 했고, 그게 팀장님 왕년의 모습과 겹쳤다는 모양인지 식사에 꽤 자주 초대된 편이었다. 그리고 그 식사의 마지막. 약 4년의 교류가 고스란히 담긴 가이세키 코스는 ‘별일이 다 있었지만, 잘 살았다’고 나를 다독여주는 맛이었다. 성게, 조림, 생선구이 등, 이제는 제대로 된 요리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사진을 보면 계란을 나누고, 토란을 같이 손질하던 그날 저녁이 어제처럼 떠오르니 그다지 아쉽지는 않다. 팀장님 내외와 동기, 그리고 영업부 후배와 함께한 마지막 이야기와 선물은, 마치 다음 월요일에 다시 회사에서 만날 것 같이 끝이 났다.  

 

 

에필로그

나는 이렇게 따스한 추억을 간직한 여름의 일본에, 안녕을 고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전철 안에서 눈만 돌려 마주친 광고 속 통통한 펭귄의 말,  「出勤してえらい!」에 자그마니 「がんばるね!」하고 답하는 아침은 이제 오지 않는다. 노을 지는 17시 반, 아스라이 들리는  방재무선차임 멜로디로, 오늘도 어찌어찌 보냈다며 숨 돌리는 저녁도 더 이상 없다. 

 

그렇게 모국으로 돌아와, 이번 여름으로 1년이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줄곧 일본에서 살았다. 에세이를 쓰려고 진지하게 반추한 결과, 이 에세이 <화양연화>의 프롤로그에 적은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잘 즐겼구나’ 싶은, 지난할지언정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확언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봄에는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에서 모르는 샐러리맨 아저씨들의 호의에 편하게 꽃놀이하기도 했고, 어느 여름에는 언제나 맑다는 晴れの国, 캐치 카피 하나만 믿고 굳이 태풍을 향해 오카야마로 여행을 가기도 했으며, 어느 가을에는 나가노산 사과로 만든 주스를 품종별로 모아 비교하는 풍류를 즐겼고, 어느 겨울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톳토리사구(鳥取砂丘)에서 한국인 모녀 관광객을 구하기도 했으니까. 서럽거나 속상한 기억이 없던 것도 아니지만, 이만하면, 그리고 미처 적지 못한 행복하고 반짝이는 추억도 꽤 되는 걸 보면, 즐거웠다고 단정 지어도 되지 않을까.

 

마침표를 찍을 이 에세이의 끝이 ‘그리고 무사히 한국에 적응했습니다’ 라면 좋겠건만 그러지 못한 게 내심 아쉬워도 어쩌겠는가.

삶은 계속되고, 삶의 터전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뀌었을 뿐, 화양연화는 또 찾아올 테니까.

 

 

 

글・사진 : 도쿄도, 쥬니

 


「화양연화」 모아 읽기

 

 

[화양연화]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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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가을편

화양연화 : 가을 편 높은 습도로 통 속의 찐만두가 되었던 지난 계절을 생각하면, 공기에 선선함이 묻어나오는 가을은 짧아도 감사한 계절이다. 나는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지 유독 여름에는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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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겨울편

화양연화 : 겨울편 겨울이 되어 쌀쌀해지면, 괜스레 온기 같은 것이 그립기 마련이다. 고향의 겨울과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도쿄가 춥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제는 두 손 다 써도 셀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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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봄 편

연호라는 개념은 알지라도 어딘지 모르게 낯선 단어이다. 헤이세이(平成)가 끝나고, 레이와(令和)가 새 연표로 공표되던 2019년 4월 1일. 그날의 이상한 기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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