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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NUMBER_2022上/2021.가을.vol.01

[일본여행]나가노현 가미코치에서의 우중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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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택근무 2년 차,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데 집에서만 생활한 지 2년이 되어가자 이제 집안일의 달인이 되다 못해 집에서 혼자 노는 것에도 도가 텄다. 특별히 무언가 하지 않아도 어느새 시간이 사라져버리는 나날들의 연속, 일과 휴식의 경계가 모호해진 생활에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다. 이 좁은 방을 벗어나 광활한 자연을 만끽하고 싶은 욕망! 바다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내 친구는 이런 현상을 ‘혈중 바다 농도가 떨어진 상태’라고 표현하던데, 그렇다면 나는 비슷한 맥락으로 ‘혈중 여행 농도가 떨어진 상태’일 것이다. 이 여행농도를 올리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여행을 떠나는 것.

그렇게 결정한 여행지는 나가노에 있는 가미코치(上高地)다.

 

 

  가미코치는 나가노현(長野)에 위치한 유명한 여행지이다. 특히 여름에 피서지로 인기가 많은 이곳은 중부 산악 국립공원의 일부로 해발 1,500m 지점에 있어 여름에도 최고 온도가 25℃〜27℃ 정도밖에 되지 않아 시원하다. 가미코치 하면 생각나는 풍경은 맑은 물이 흐르는 아즈사강 위에 고즈넉이 놓인 갓파바시(河童橋), 그리고 그 뒤편에 만년설이 보이는 산맥이 웅장한 병풍처럼 펼쳐진 풍경이다. 나는 이 사진 하나에 반해서 가미코치를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이번이 첫 번째 방문은 아니다. 가미코치를 처음 알게 된 건 올해 초였는데,  여행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날씨가 따뜻해지자마자 4월 말, 가미코치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내가 맞닥뜨린 것은 예측 불가의 산 날씨였다. 당시 도쿄는 이미 봄이 한창이었는데 가미코치는 여전히 겨울이라, 맑은 풍경은커녕 도쿄의 겨울에도 보지 못한 눈만 실컷 구경했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이 더욱더 기대되었다. 뭐가 필요한지, 어떻게 가면 좋을지 미리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알차게 가방을 꾸렸다. 변덕이 심한 날씨에 대비해 방한용 겉옷과 햇빛을 가려줄 모자도 챙겼다. 비가 올 수도 있으니 작은 우산도 잊지 않고. 야간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일정을 생각해 간단히 요기할 먹을거리도 야무지게 가져갔다.

 


 

 

  버스에 오른 직후는 매우 신이 났다. 우리가 드디어 여행을 간다는 기대만 가득해서 서로 이런저런 사진을 찍으며 즐거움을 자랑했다. 야간버스에서의 쪽잠도 우리의 여행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행운의 요소 같았다. 버스는 우리 셋과 다른 여행객 셋을 태우고 출발했다. 휴게소 정차는 두 번이라는 안내를 듣고 우리는 첫 번째 휴게소에서만 내리고 이후에는 쭉 자기로 합의하고 편하게 잠들기 위한 준비를 슬슬 시작했다.

 

  잠깐 토끼잠에 들었다가 눈을 뜨니 어느새 벌써 첫 번째 휴게소에 도착했다. 깊은 밤 우리는 셔터가 내려간 휴게소를 누볐다. 여행의 기쁨으로 솟구친 아드레날린이 우리의 동력원이었다. 늦은 밤까지 깨어있으려니 살짝 출출해졌기 때문에, 휴게소에서 유일하게 문을 연 매점을 구경하다가 주먹밥을 하나씩 사 먹었다. 여기에 작은 컵라면만 있었어도 참… 아니다. 자기 직전의 라면의 맛은 언제나 옳지만, 몸에 좋지 않다.

 

  짧은 외출을 즐기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곧은 길을 달렸고 비는 줄기차게 차창을 때렸다. 아득한 빗소리를 들으며 잠깐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버스는 어느새 서늘한 나무들 사이를 달리고 있었다.

 

  상냥하신 버스 기사님이 옅은 불빛으로 승객들을 깨워주셨다. 희미한 빛에 잠에서 깬 나는 커튼을 걷고 창밖을 살펴봤다. 아직 새벽이라고 이르기엔 무색할 정도로 새카만 어둠이었다. 버스의 전조등으로 비에 젖은 길을 밝히며 달리는 산길이 어느 공포 영화의 도입부처럼 느껴지는 순간,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이쇼이케(大正池)에서 가미코치 버스터미널까지 걸어 올라가는 하이킹 코스. 대략 한 시간쯤 걸리는 간단한 산책코스라고 한다. 아주 깜깜해서 발밑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그런 거겠지’라고 생각하며 어슴푸레한 풍경의 사진을 몇 장 찍어두고 산책길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신이 났다. 멋있는 고산지대의 식물들과 웅장한 나무들이 산뜻한 공기를 실컷 들이마시니 도시를 떠났다는 게 실감 났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어서 이 모든 풍경을 우리끼리 만끽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즐거웠다. 어딜 둘러봐도 아름다운 자연의 색깔이 펼쳐져 있어서 눈이 시원해졌다. 발목을 스치는 풀잎의 서늘한 물방울, 오랜만에 밟아보는 촉촉한 흙과 풀의 감촉을 충분히 즐기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 걷다 보니 나무 블록을 깔아 만든 산책로가 보였다. 방향을 몰라도 이 나무 길만 따라가면 된다니 안심이 됐다. 뚜벅뚜벅 나무 길을 밟는 발소리가 나뭇잎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와 어우러져 정겨운 산책길이 될 거라는 건 내 허망한 상상일 뿐이었다. 이 빗소리는 내가 기대한 토독토독 내리는 가을비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위대한 자연에 감히 도전하는 아둔한 인간을 조롱하는 대자연의 웃음소리 같았다.

  솨아아 솨아아 나무들이 휩쓸리는 바람에 맞춰 비도 옆으로 내렸다. 나의 작디작은 우산은 그저 정수리를 보호해 주는 허술한 가림막에 가까웠다. 방수 소재의 겉옷도 휘몰아치는 빗줄기에 이미 축축하게 젖어, 채 흡수하지 못한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뿌옇게 날이 밝았다.


 

  신나게 사진을 찍으며 웃고 떠들던 우리 사이엔 어느새 침묵이 깊게 내려앉았다. 다들 말은 없었지만 같은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묵묵히 내딛는 발걸음마다 말 없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괜히 왔나?’, ‘이 비는 언제 그치는 거지?’, ‘얼마나 더 가야 도착하는 걸까?’, ‘ 춥고 배가 고프다’. 아마도 그 중엔 나의 외침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묵묵히 걸으며,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현재가 아닌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빨리 도착해서 맛있는 아침밥을 먹고 싶다.”

“가미코치 버스터미널은 따뜻하겠지?”

“우리, 다음 여행을 갈 때는 비 오는 산은 꼭 피하자…”

가까운 미래에 이루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돌고 돌았지만, 아무도 이 주제를 질려 하지 않고 따뜻한 장소와 맛있는 밥에 대해 열정적으로 토론했다.

 

  마침내 거대하고 축축한 숲길에서 벗어나 건물이 보이는 큰길에 들어섰다. 빗길에 고된 도보를 강행하고 계신 다른 산악인 선생님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 고생을 하는 게 우리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알 수 없는 내적 친밀감이 빠르게 상승했다. 이래서 등산을 하면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정겹게 인사하게 되는 걸까? 걸으면 걸을수록 사람이 더 많이 보였다. 영업을 하는 듯한 호텔들도 보였다. 자연 풍경을 감상하며 아침 식사를 할 수 있게끔 식당에 창문을 크게 낸 호텔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 식당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보기로 했지만, 역시나 예약하지 않은 외부 방문객은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다시 길을 재촉했다.  우리의 목표는, 가미코치 터미널 위층에 있는 식당에서 맛있고 따뜻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정돈된 큰길에 좀 더 따라 걷자 너른 아즈사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강의 거센 물결 위로 뿌연 산안개가 아름답게 출렁였다. 굵은 산맥 사이사이에 걸친 안개들이 험한 산세와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거대한 수묵화 같았다. 아니, 어쩌면 수묵화를 그린 화가들이 이런 감동적인 풍경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보이는 그대로 그림을 그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춥고 눅눅한 몸을 쉬이고 싶어 한시바삐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과 이 아름다운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눈과 카메라에 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여길 보고 저길 봐도 너무나 절경이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눈이 바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손도 바쁘게 움직였다. 내가 보는 이 풍경과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이 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친구들도 같은 마음인지,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대다가 어느새 모두 카메라를 든 손을 내리고 감탄하기 시작했다. 땅을 보고 길을 걷다 다시 눈을 들면 또다시 그 압도적인 풍경에 감탄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걷는 건지, 더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를 옮기는 건지 목적이 불분명한 걸음을 걸었다. 사진을 정신없이 찍어대는 사이 이미 양팔과 양다리, 신발과 양말 속까지 모두 젖어버렸다. 충분히 사진을 찍은 것 같다는 만족감과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푹 젖어버린 신발의 질척함을 느끼고서야,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멈추지 않고 걸어가기로 했다.

 

  물웅덩이를 여러 개 건너자, 금방 갓파바시에 도착했다. 우리가 걸어 올라간 길은 가미코치 버스터미널의 강 건너편 길이라 터미널을 지나쳐 갓파바시까지 걸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가미코치의 대표 명승지에 도착했지만 이미 아름다운 풍경을 잔뜩 만끽하고 온 터라 갓파바시의 아름다움이 대단히 특별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기대한 에메랄드빛 강물 위를 가로지르는 고즈넉한 다리와 웅장한 만년설이 보이는 산맥의 풍경은 악천후 탓에 그 어디에도 없었지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속세의 풍경보다 선계의 풍경 같았던 아까의 풍경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유명 관광지에 왔다 갔다는 인증샷 정도의 사진만 찍고 드디어 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대다수가 전문 장비를 갖춘 산악인들로,  주말 동안 등산과 캠핑을 즐기러 온 것 같았다. 우리는 그런 등산 전문가들 사이를 가르고, 가미코치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장 이른 버스 티켓을 찾아봤다. 가장 가까운 도시인 마츠모토로 갈 수 있는 첫차는 7시 50분 출발이었다. 우리가 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7시 정각. 50분이면 아침 식사를 빠르고 배부르게 해치우기 충분했다. 말없이 밥과 따뜻한 미소시루, 짭짤한 연어구이와 계란말이를 먹는 데 열중했다. 정신없이 밥을 먹고 버스에 올라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이미 어둑한 산(‘선계’)을 벗어나 어느새 햇살이 비치는 현실(‘속세’)로 돌아와 있었다.

 

  산 위의 날씨는 그토록 서늘하고 매섭더니, 산 아래의 날씨는 상냥하고 포근했다. 젖은 옷들을 어서 말려주길 바라며 마츠모토 시내로 향했다. 마츠모토 역에 도착할 쯤 옷들은 버석하게 말랐지만, 신발은 여전히 축축했다. 그래서 시내에서 충동적으로 새 신발을 사 신었다. 이번 여행은 총 두 가지의 결과물을 남긴 셈이다.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사진들과 여행을 마무리해준 새 신발.

 

 

 

  산뜻한 새 신발을 신고 도쿄로 돌아가는 기차에 앉아 휴대폰 속 남은 사진들을 살펴봤다. 꿈만 같던 한 시간 전의 풍경을 되새기며 돌아오는 길은, 비바람에 시달려 피곤해질 대로 피곤해진 몸도 노곤하게 풀려, 정말로 꿈결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스르르 감기려는 눈으로 애써 여행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카미코치에서 두 번씩이나 고생을 하긴 했지만,  언젠가 또 혈중 여행농도가 떨어지면, 수많은 사진을 보며 이 신발을 신어야겠다고.

 


글·사진 I 레몽

기록과 여행을 좋아하는 게으름뱅이. 평범한 일상의 반란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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