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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NUMBER_2022上/2021.가을.vol.01

[화양연화]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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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을 일본에서 보냈다.

10대의 끝자락에 도쿄의 한 ​미술대학에 진학해, 20대의 끝자락에서 1년 늦은 2020 도쿄 올림픽・패럴림픽과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들썩이는 일본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보낸 10년의 이야기를 여기에 풀고자 자그마한 자리를 얻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일본에서도 확산세였던 2020년 겨울, 나는 일시 귀국했다. 회사가 감사하게도 여러모로 사정을 봐주어, 한국에서 한 달간 재택근무를 하게 됐기 때문이다.

 

처음 발을 딛는 인천 국제 공항에서 유증상자로 분류되어 코가 쑤셔지는 가운데, 나는 생각했다.

 

살았다.

 

당시의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편도 1시간 거리의 회사에 가기 위해 텅 빈 토자이(東西)선을 타면서, 내가 탄 차량의 창문이 전부 열려 있지 않으면 불안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출입문 옆에 딱 붙어 있었다. 노래가 샌다고 혼나도 족할 큰 음량으로 K-pop을 들으며 나와 전철이라는 공간을 분리하지 않으면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역에 내리면 마치 어설프게 짠 걸레와 같이 땀에 흠뻑 젖어, 미열에 헛구역질하는 환자였다.

10시에 일을 시작하면, 24시에 끝나는 것이 일상다반사인 그런 쳇바퀴 같은 생활 속에 식욕도 잃어, 나날이 그저 시들어만 갔다.

 

정신적인 원인으로 발생한 병이 거의 그렇듯, 이렇다 할 정확한 병명도 모른 채 한국의 집에서 자가 격리를 하며 일을 해나갔다. 하필이면 회사가 가장 바쁠 시기라 재택근무 중에도 새벽 2시에 자고 새벽 6시에 일어나 일을 하는, 그러니까 요양과는 정반대의 생활이, 한 달간 이어졌다.

 

한국에서의 재택근무 마지막 날, 오랜만의 효도라고 부모님 용돈을 챙겨 건네드리는 나에게, 그 요양이라고 부르기 무색한 한 달을 묵묵히 지지해준 엄마가 결정타를 날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암말 없어도 잘 살겠거니 했더니, 아파서 요양하러 오질 않나, 와가 회사서 쥐어짜이는 꼴 보이께, 내는 이 돈 못 받겠데이. (혹여나 경상도 사투리가 익숙하지 않을 분을 위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별일 없이 잘 살겠지 했더니, 아파서 요양하러 오지를 않나, 집에 와서는 회사 일로 쥐어짜이는 꼴을 보니, 나는 이 돈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일단 남동생에게 돈을 쥐여주고 반드시 부모님께 전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다. 다시 돌아온 나리타 국제 공항에서 레몬과 우메보시 사진을 바라보며, 검사를 위한 침을 뱉으면서 생각했다.

 

살아야겠다.

 

그래서 살려고 휴직을 했고, 퇴사를 했다. 그리고 일본을 떠났다, 즉, ‘탈본’을 했다.

그런데, 자타공인 이상주의자인 내가 세상 물정 모를 10대 후반에 도일해, 이상과 현실의 외줄 타기 속에서 멀쩡한 어른 행실을 하며 지낸 그 10년을 단순히 ‘탈본 성공’, 이 네 글자에 담으려니 억울했다. 아니, 이상했다.

내가 지금껏 보고 들은 ‘탈본 성공’은 마치,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같았다. 물론 나에게도, 회사의 살인적인 스케줄과 무능한 일본 정부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대책에 쉼 없이 굴려지다가 자살사고까지 할 정도로 일본이 꼴도 보기 싫은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른이라는 타이틀의 책임과 자유를 가르쳐준 일본 생활이 아직 삼십 줄도 안 온 내 인생의 화양연화처럼 느껴진다.

 

  화양연화 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고작 서른을 앞둔 산 사람이 논하기에는 과분한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래서 더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원래 모르는 사람이 용감하다 하지 않는가.

뭣도 모르는 채 일본의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돈보다 이상을 좇으며 입사해, 리스크 따위 생각하지 않고 생애 처음 일어난 여러 사건을 맞이하고.

그래서 이런 사람이 말하는 화양연화도 알만하다 싶으시면 언제든지 덮으셔도 좋다. 다만, 이런 사람이 말하는 화양연화로 독자 중 누군가가 나처럼 일본 생활을 반추했을 때, 그것이 더러워서, 다시는 상종 못 할 그 시기가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잘 즐겼구나’ 싶은, 지난할지언정 행복했던 순간으로 여길 수 있는 실마리가 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독자를 위해서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좋은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 내 좌충우돌 20대에 고맙고, 내 어리숙함을 받아준 일본에 감사하고, 그런 감사의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면 지금 불투명한 내 앞날에 작은 복이라도 올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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