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를 우리는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향을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라고 하면, 태어난 곳은 알겠지만, ‘자라다’라는 개념이 어디까지인지 정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렇게나 ‘국경’이라는 개념이 희미해지고 자신이 살고 싶은 나라를 선택해 이주할 수 있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예컨대 이민 1.5세대나 흔히 말하는 ‘교포’는 어디를 고향이라고 부를까.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우리가 사는 곳이 한국과 가까운 일본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이방인처럼 느끼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게, 나를 타자(よそ者)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았던, 얼마나 익숙하던 영원히 이방인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할퀴어도 찢어지지 않는 얇고 투명한 막이 나를 차단하고 있는 걸 때때로 느낄때면 대체 얼마나 더 있어야 이 막이 녹아 없어질까 고민하고,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들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누가 우리를 타자라 대해도, 나는 ‘정들면 고향住めば都’이라고 꿋꿋하게 말하고 싶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다 있겠지만, 결국에는 정이 붙어 내 기억에서 잊혀질 수 없게 된 곳을 ‘고향’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어떻게 부를까.
나에겐 일본에서도 특히 대학생활을 보낸 도쿄의 서쪽이 그랬다.
벚꽃의 꽃잎이 마치 콘페티처럼 휘날리는 길을 걸어 입학식장으로 향하던 봄의 쿠니타치(国立). 매미 소리가 쩌렁쩌렁하고 찌는 듯한 더위에도 꾸역꾸역 유카타를 입고 불꽃놀이를 보러 갔던 여름의 후츄(府中). 크림치즈와 딜, 훈제 연어와 케이퍼를 넣은 베이글을 먹으며 낙엽을 구경했던 이노가시라(井の頭)공원. 새해 선물로 친구에게 보내기 위해 팔찌로 된 오마모리(お守り:부적)를 사러 갔던 아사가야(阿佐ヶ谷).
이 뿐만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했던 신주쿠 인근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신주쿠역으로 가던 길은 복잡하고 떠들썩하고, 여러 인간군상이 흘러넘쳐 짜증스러울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가 아니었다면, 내향적이고 밖에 나가는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내가 신주쿠라는 곳에 정을 붙일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모든 장소에 곳곳에 기억이 담겨서, 떠올리면 돌아가고 싶고, 그립고, 때론 그때로 돌아가지 못해 쓸쓸하기까지 한 장소를 고향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에게서 이런 기억과, 기억과 함께 새겨진 정을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오히려 나를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이 감정을 생각하면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해서 의식조차 못 하는 걸, 우리는 의식하며 살 수 있다. 이건 굉장히 멋진 일이 아닐까. 타인이 우리를 누구라고 규정한들, 우리는 여기에 살아가고 있고, 그렇게 얻어 낸 우리의 또 다른 고향을 ‘정’으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앞으로 일본에서의 내 삶이 어떻게 흐를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 나는 미시적으로는 계획적인 성격이지만, 거시적으로는 몹시 비 계획적인 편이다. 언젠간, 한국을 떠나왔듯이 일본도 떠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내 집이나 차를 살 계획도 없고, 큰돈을 주고 가구도 사보지 않았으며, 심지어 실비 보험도 가입하지 않았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누군가는 ‘딱히 정을 붙인 것도 아니지 않느냐’할지도 모르지만, 언제든 내 삶이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정을 붙이는 건 다른 이야기다.
그러다 타의로든 자의로든 일본을 떠나게 된다면, 나는 분명 여기를 그리워하고, 때로는 일본에 돌아가고 싶다고도 생각할 것이다. 나빴던 기억마저도, 그래도 어쩌겠어, 고향인데, 하고 수용한 채로.
住めば都。
일본에도 이런 속담이 있다는 건, 일본인 중 에서도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있고, 속담으로 만들어져 전해질만큼 많다는 뜻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결국 그 사람들도 타자지만, 이국에 살며 정이 든 곳이 결국엔 고향이 된다는 걸 겪어봤다는.
그렇지만, 그래도 어쩌다 한 번쯤은 일본에도 ‘정들면 고향’이라는 속담이 있다는 걸 떠올려 봐주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글 : 도쿄도, Yuka
도쿄의 카페라면 어디든 여기저기 불쑥 튀어나오는 두더지. 일상의 피로를 애프터눈티와 화장품 구매로 해소하며 일본 경제 활성화의 큰 도움 주고 있는 회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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