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 가을 편

높은 습도로 통 속의 찐만두가 되었던 지난 계절을 생각하면, 공기에 선선함이 묻어나오는 가을은 짧아도 감사한 계절이다. 나는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지 유독 여름에는 수면을 부유하는 해파리처럼 활기를 잃고 지내기 일쑤여서, 겨울로 넘어가는 가을의 아이덴티티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천고마비의 가을이라고 먹을거리가 풍족해지는 게 아주 좋다.
무나 가지, 밤같이 가을 하면 꼭 먹어줘야 할 식자재가, 누구나 마음속 한 켠에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버섯인데, 전술과 달리 버섯을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팽이버섯이나 양송이와 같이 도시에서 주로 소비할 법한, 그리고 이미 인공재배가 가능한 종류의 버섯만을 먹어왔었다.
그런 나에게 회사 팀장님의 나가노(長野)로 떠나는 버섯 따기 여행 제안은, 그저 ‘버섯을 아예 못 먹지는 않으니까’ 하고 덥석 물기에는 너무 심오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팀장님은 사회인이 되고서 처음 만난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른인지라, 오리가 알을 깨고 나서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인식하듯 졸졸 따라다니기를 좋아했었으니. 그리고 팀장님과 동향이며 그처럼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영업팀 사원이자, 한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어 내 높은 퍼스널 스페이스의 벽을 부수고 들어온 후배 사원, 와카쨩이 최종 멤버로 발탁되었다.
나, 팀장님, 그리고 와카쨩은 가을비가 살짝 그친 주말 새벽부터 나가노로 향했다.
나가노현 노지리호(長野県 野尻湖). 무려 신생대에 일본에 서식하고 있었다고 하는 나우만조우(ナウマンゾウ)의 상이 반겨주는 도로를 좀 더 달려 안으로 들어가면 게스트 하우스 LAMP 노지리호가 나온다. 마케팅 혹은 웹 계열 업무에 종사하는 분들에겐 친숙할 수도 있는, 재미있는 오운드 미디어로 유명했던 LIG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중 하나다. 팀장님이 철 되면 버섯 따고, 산나물 따러 간다는 바로 거기였다.
다 잘 알고 있겠지만, 산에서 나는 작물을 함부로 먹는 것은 위험하다. 우선 그 산의 소유자가 개인인지 공공의 것인지 모를 수 있어 법적으로 위험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버섯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빨갛고 예쁜 버섯은 독버섯'이라는 마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상식 같은 말이 통용되지 않고, 식용 버섯과 비슷하게 생긴, 독을 가진 버섯도 많아 어설픈 지식으로 먹으면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 버섯은 정말 흰 계란같이 생긴 포자를 뚫고 자라나는 빨갛고 예쁜 버섯이다. 생긴 것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달걀버섯(タマゴタ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달걀버섯처럼 빨갛고 예쁜 버섯인 이 버섯의 이름은 광대버섯(ベニテングタケ)이다. 비가 크게 내리면 다 생장한 것은 무엇이 달걀버섯이고, 무엇이 광대버섯인지 일반인은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둘 중 하나, 그러니까 광대버섯은 먹어도 죽지는 않지만, 복통과 설사, 환각을 일으키는 독버섯이다. 신화 속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몇백이 넘는 풀들을 일일이 씹어 독풀과 해독 풀을 한족에게 알려준 신농도 그렇고, 도대체 이렇게 애매하고 어렵고 위험한 것을 인간은 왜 먹기 시작했을까.


이 버섯 따기 여행의 신농은 버섯 검정 자격을 따신 인솔자 두 분이었다. 위의 달걀버섯과 광대버섯 이야기 외에도 두 분을 따라, 감탄과 경악을 왔다 갔다 하는 등산길에서 나는 득도할 것 같은 기분으로 개인에게 배분된 광주리 속으로 버섯을 던졌다.
등산길로 표현하긴 했지만, 버섯이라는 게 어디 인간이 다니는 길에만 있으랴. 몸풀기로 차를 타고 올라가 설렁설렁 길가에서 뽑는 1부가 끝나고, 썩은 고목을 발판 삼아 올라가기도, 드문드문 박혀있는 작은 돌에 발을 얹고 내려가기도 해야 하는 험한 길을 따라 산 깊이 더 들어가는 2부가 시작됐다. 비 온 뒤라 버섯이 다 썩고, 험한 산행이 될 것을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버섯 수확량은 좋았다. 신이 나서 저 멀리 먼저 움직이는 팀장님과 버섯 따기 여행 유경험자인 와카쨩의 등에다 나는 "이렇게 힘들다고는 말 안 했잖아요." 하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거의 다 돌았다면서, 곳곳에 자란 조릿대 하나를 잡고 내려가는 길. 나는 생전 처음 코피를 흘리게 된다. 버섯 따기에 흥분했냐고? 아니, 삐죽하고 죽창 같은 조릿대 하나 붙잡고 내려오니 조릿대가 코안을 쑤셔서 피가 났다. 스물 하고도 몇 년간 코피 한 번 흘린 적 없이 촉촉하고 건강한 점막으로 고이 자랐는데, 조릿대 하나의 물리 공격으로 터졌다. 내 멘탈도 같이 터졌다.
"코피... 나 고3 수험생 때도 안 났는데... 이게... 이게 뭐야..." 하면서 기세 좋게 철철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한 넋 나간 소리에, 팀장님도 후배도 웃음이 터졌다. 이 사람들이, 사람이 코피를 쏟는데 웃고 말이야, 너무하네...
코피와 등가교환이라도 한 걸까. 진짜 마지막 코스라며 개울가를 따라 걷는데, 팀장님이 엄청난 크기의 잎새버섯(舞茸)을 찾아내었다. 슈퍼마켓에서 보는 잎새버섯의 한 3~4봉지 정도에 견줄만한 크기였다. 흡사 벌집 같은 형태로 봉긋하게 잘 자랐는데, 그걸 쥐고 있는 팀장님의 비주얼이 한몫해서 어딘지 모르게 꿀을 발견한 곰돌이 푸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릴 때쯤이 돼서야 버섯 채취 코스는 끝이 났고, 차를 타고 베이스캠프인 Lamp 나가노 長野로 돌아왔다. 버섯 검정 자격을 가진 인솔자가 동행했지만 한 번 버섯 채취 체험에 나갈 수 있는 인원이 10명 정도이니, 한 사람 한 사람 다 커버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따온 버섯을 한자리에 모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생겼지만 먹으면 죽는 것을 선별하는 과정을 거친다. 선별하는 과정에는 나도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이 버섯들로 버섯 디너, 즉 버섯을 메인으로 하는 코스 요리를 먹게 되기 때문. 팀장님의 잎새버섯 외에는 시큰둥하던 나도 내 입에 들어간다고 하니, 재빠르게 분별하는 능력이 붙었다. 그때 붙은 능력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달걀버섯이랑 광대버섯은 달리는 차 안에서 봐도 알아챌 수 있다! 엣헴!

그렇게 선별해 소반에 담은 버섯들은 버섯전골이 됐는데, 고추장을 푼 매콤 칼칼한 버섯전골이 아닌지라 맑은 국물만 나와 밍숭맹숭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갓 딴 버섯을 실컷 먹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겠다 했던 것이 웬걸, 버섯의 채수 덕분일까, 말도 안 되게 맛있었다. 버섯의 은은한 단맛이 풍부하게 우러나오는 데다 버섯 종류별로 수확량도 많아서 시중에서는 먹을 수 없는 독특한 식감을 즐길 수 있었다. 흔히들 아는 버섯의 살캉살캉한 식감 외에도 삶은 닭가슴살같이 쫄깃하거나, 물에 넣었음에도 버석함이 남아있거나 하는,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맛을 경험했다. 소반의 버섯은 세 번에 나눠 끓여야 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었는데 가면 갈수록 육수가 맛있어서 배가 차는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훌륭한 맛이었다. '버섯만으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내 생에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꿈같은 저녁 식사였다.


다음 날, 우리는 도쿄로 돌아가, 아니, 다시 채비해 니가타현(新潟)으로 떠났다. 니가타현 이토이가와시 길의 역 마린 드림 노우(道の マリンドリーム能生)로 게를 먹으러! 이곳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해역에서 잡히는 게로는 일본 제일로 꼽힌다는 곳이다. 널찍한 직판장 건물에 게를 중심으로 석화, 성게 등 해산물이 즐비한데, 경상도 바닷가 도시 출신인 나조차 디즈니랜드에 처음 온 어린아이처럼 두근두근거릴 정도의 풍경이었다.


이곳은 각 점포가 자기 배를 소유하고 있거나, 자기 가게에만 공급하도록 특정 선박과 계약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가게의 이름에는 배를 뜻하는 환 丸 자가 들어가 있다. 게다가 그 이름의 배에서 잡힌 게는 바로 가게로 들어가고, 게를 고르면 그대로 주방으로 옮겨져 삶아진다. 그것을 받아 들어왔던 가게 입구의 반대쪽 출구로 나아가면 바다가 보인다. 신선도 자랑을 홍보문구 한마디 없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소비자 경험 속에 녹여내다니!
잔잔한 바다를 눈앞에 두고, 내장까지 녹진하게 삶아진 게를 마디마디 뚝뚝 뜯어 팀장님 하나, 와카짱 하나, 나 하나 들고 우물우물하는데,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게의 맛이야 배에서 잡은 걸 바로 푹 삶아 먹으니 잘 못 삶아서 또는 신선하지 않아서 나기 쉬운 게 비린내 같은 것도 하나 없이 깔끔하다. 하나 아쉬운 것은 한국인의 디저트인 게딱지 볶음밥이 여기서는 안 된다는 점? 날치알과 깨, 조미김으로 살살 비벼 볶은 밥을 게딱지에 턱 담아 내장과 비벼 호로록, 해야 마무리인데, 그럴 수가 없다.
나가노부터의 여정이 내겐 너무 진했던 것인지, 나는 여독에 취해 도쿄에 돌아올 때까지 차에서 깨지 못했다. 하지만 도쿄로 돌아가는 길은, 팀장님도 와카짱도 나도, 맛본 한 입 한 입이 아쉬워 후일을 다지게 되는 길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너무 바빠져서 다시는 못 가게 되었지만... 와카쨩한테는 ‘코 찔려서 무서워서 그러지?’ 하고 두고두고 놀림받았지만, 말해두자면, 맛있던 기억에 아이폰 사진첩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우지 못하는 여행으로 다시 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다.
단풍이 들고, 입맛도 드는 가을이지만, 아마 이번 해도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여행을 다니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슈퍼에 사시사철 놓여있는 버섯을, 비싸고 요리하기 힘들다며 선뜻 손이 안 가는 게를, 가을이니까 한 번 더 종류를 유심히 보거나, 눈 한 번 딱 감고 사보는 그런 가을이 되면 좋겠다. 가을의 화양연화란 그런 것이 아닐까. 늘 맛있는 것들이, 더 맛있게 돌아와 나를 살찌우는.
글, 사진: 도쿄도, 쥬니
[화양연화]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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