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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NUMBER_2022上/2022.봄.vol.03

[PICK UP]일본생활에 지친 나를 달래주는 소울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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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생활이 지치고 피곤할 때,
그럴 때 꼭 먹어줘야 하는 나만의 소울푸드

 

일 하느라 힘들었죠, 맛있는 밥 먹고 또 힘내서 일합시다.

규카츠 

 

언제 처음 먹어봤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힘든 일이 있거나 힘을 내고 싶은 일이 있거나 축하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혼자서 규카츠를 먹으러 가는 것이 언제부턴가 내 습관이 됐다. 각오를 다져야 하는 일을 앞두고 돈카츠 ( かつ=勝つ, 카츠’는 ‘이기다’의 동사와 동음이의어라 기합을 넣는 의미로 돈카츠를 먹는 문화가 있다 )를 먹는 일본인들의 문화보단, 월급 타면 소고기를 사 먹는 한국인의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라 자부한다. 

 두툼한 소고기에 튀김옷을 얇게 입힌 후, 겉만 바삭하게 튀겨내어 흰 쌀 밥과 함께 내는 규카츠 정식. 규카츠는 돈카츠와는 달리 속은 익히지 않고 내기에, 음식을 받은 손님이 자리에 있는 1인용 돌판에 각자 취향껏 적당히 속을 익혀먹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규카츠를 좋아하는 이유다. 스타벅스에서 음료 한 잔을 주문해도 내 취향대로 커스터마이징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까다로운 성격이라, 음식도 내 취향대로 조리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이 좋다. 나 같은 월급쟁이 서민은 힘들게 번 월급으로 기왕 비싼 소고기를 사 먹는 거라면, 굽기 정도쯤은 내 취향에 맞춰야 제대로 잘 먹은 기분이 나지 않을까.

 자주 가는 가게는 한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모토무라 규카츠(元むら牛カツ)’ 인데, 수도권 각지에 점포가 있어 찾아가기도 쉽다. 가게에 들어서면 오픈 키친에서 조리 중인 요리사 분들과 홀 점원분들이 따스하게 맞아주시는데, 혼자서라도 얼마든지 마음 편하게 갈 수 있는 점도 그 가게를 좋아하는 이유다. 누구나 들러서 돈을 내고 사 먹는 식당이지만, 마치 내 가족이나 친지의 집에 놀러 와 밥 한 끼 얻어먹는 것 같은 정겨운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먹다가 부족하면 공깃밥은 무료로, 고기는 유료로 추가할 수 있다. 뜨끈한 된장국과 명란젓도 공깃밥을 향한 젓가락 질을 멈출 수 없게 한다. 그렇게 멋진 식사를 하고 나면, 힘든 일들도 척척 소화시키고 앞으로 다가올 인생의 산들도 씩씩하게 넘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맛있는 식사 한 끼가 주는 위로와 용기는 대체 어디까지인지, 밥의 민족 한국인은 규카츠 정식으로, ‘내일은 뭐 먹지?’ 고민을 하며 하루를 산다.

 

카나가와현, Jeudi

 


당신을 어루만질 일본의 빨간 국물

아카카라(赤辛) 

 

일본에서의 삶이 지치는 이유야 천차만별일 테다. 그럴 때마다 빨갛고, 맵고, 따뜻한 음식이 고픈 것은 어째서일까? 아마도 한국인이라면 다들 그렇지 않을까.

식을 줄 모르는 한류의 인기와 코로나 19의 (대환장) 콜라보로 신오오쿠보에 사람이 전보다 더 붐벼 좀처럼 갈 수가 없어졌다. 그래도 매콤함으로 내 입과 정신을 다독여줘야 할 때, 아카카라 나베 스프를 마트에서 사 오기로 한다. 맵기로 따지면 5번(시판용 나베 스프는 1번, 3번, 5번, 그리고 자칭 한계라는 15번이 있다) 정도는 넣어줘야 달래질 한국인 입맛이지만, 웬만한 마트에는 3번만이 매대에 나와 있으니 타협할 뿐이다.

나베 스프에 넣을 재료 또한 중요하다. 힘든 나에게 주는 상이니 비싸다고 장보기 리스트에서 늘 뒷전이던 소고기도 좀 집어주고, 신선한 제철 채소도 장바구니에 휙휙 넣어왔으니 이제 한 데 넣고 부글부글 끓이기만 남았다. 참 간편하게도 아카카라 나베스프는 물을 타지 않아도 된다. 

‘그래 봤자 일본 식품 회사가 내놓은 매운 음식이라 고만고만하겠지!’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원재료에 들어 있는 두반장부터 일본 된장, 굴 소스 등 갖은 맛깔난 조미료에 고추장, 마늘 등 한국인의 코어 식자재가 한 스푼 뜬 당신의 입에서 절로 ‘크어어~’를 외치게 할 것이다. 고추장찌개와 비슷한 맛을 내는 국물이 스며든 고기, 야채를 한 젓가락 입에 넣으면 적당히 칼칼하고 뜨끈해서 조금은 헛헛함이 가신다.

여력이 된다면 밥이나 면까지 넣어 먹고, 수저를 내려놓으면서 중얼거리자.

어느 멋진 트위터리안처럼 행복하세요., 저도 행복할게요.. 하고.

밥의 민족 한국인은 일본에서 이렇게 치유하며 산다.

 

도쿄도, 쥬니


토리를 야쿠 & 하이한 볼

하이볼&야키토리 

일본에 와서 배운 것 중,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한 가지는 '미즈와리(水割り)'와 '탄산와리(炭酸割り)'라는 말이었다. 술에 물을 섞어 마시는 미즈와리와, 역시 술에 탄산수를 섞는 탄산와리, 술에 술을 섞는 한국인의 음주 문화에서는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발상이지만, 나는 일본 생활 반년만에 위스키에 탄산수를 섞어 만든 하이볼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차가운 글라스에 얼음 가득, 위스키와 탄산수, 레몬 한 조각으로 완성한 시원한 하이볼. 위스키보다 가볍고 맥주보다 산뜻해서, 술을 좋아하면서도 술에 약한 나에게는 이만한 것이 없다.

하이볼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에 가면 여러 종류의 위스키와 가니시로 다양한 하이볼을 맛볼 수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퇴근길에 있는 작은 야키토리 집이다. 시원한 하이볼 한 잔에, 취향 따라 기분 따라 고를 수 있는 야키토리는 저렴한 가격으로 하루의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그야말로 가성비 끝판왕의 조합. 

실패한 일은 시원하게 마셔버리고, 네거티브한 생각은 빈 꼬치에 폭 꽂아두고 나오자.

분명 내일 하루도, 웃으면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쿄도, SWAN


냠냠 스테-키는 스테키(ステーキはステキ)

내 영혼의 양식, 스테이크

나는 고기 중에서도 구운 고기를 제일 좋아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내 의견을 적극 반영해 한 달에 한 번 고깃집으로 가족끼리 외식을 하러 갔었다. 그러나 일본으로 유학을 오고 나선 한 푼 두 푼 모아 혼자 힘으로 사 먹으려니, 일본 야키니꾸(焼肉)의 얼마 안 되는 양과 비싼 가격에 슬퍼져 찾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한줄기 빛 같은 존재를 발견했으니, 바로 스테이크! 한국보다 패밀리 레스토랑 문화가 널리 자리 잡은 일본에선 저렴하고 쉽게 스테이크를 즐길 수 있었다. 얇디얇은 야키니꾸 집 고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두툼해 육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서 유학생활에 지칠 때 한 번씩 찾아간다. 그중에서도 나는 ‘이키나리 스테키(いきなり ステーキ)’라는 체인점에 간다. 그곳에서만 제공하는 샐러드드레싱이 내 취향이랄까. 그리고 스테이크 소스를 마음껏 뿌려 먹을 수 있다는 점도 좋다. 최근엔 연말에 한 번 먹고 왔으니, 다음 가을 호엔 여름에 몸보신으로 닭백숙 대신 먹고 왔다는 후기가 있을지도…

 

도쿄도, 냠


마음이 아플 때 먹는 우동

이사한 뒤로도 줄곧 같은 심료 내과를 다니고 있다. 병원이 있는 역은 여러 사설 철도가 엮이는 곳이라 아토레 백화점과 이토요카도가 있어 늘 북적인다. 4년간 빠짐없이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다니고 있다. 

상담실 의자에 앉아 그간 내게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를 일본어로 열심히 엮다 보면 눈물이 날 때도 있다. 눈물을 닦은 휴지를 손에 구겨 쥐고 병원을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면 딱 점심시간이 된다. 그러면 이토요카도의 푸드 코트로 간다. 그리고 어김없이 우동을 주문한다. 한국은 아플 때 죽을 먹는데, 일본은 보통 우동을 먹는다. 소화가 잘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뭐든 쌀이 최고인 한국인인지라 '그래도 밀가루잖아'라며 반박하고 싶어 지지만, 적어도 내게 우동은 '마음이 아플 때' 먹는 음식이다.
일본의 프랜차이즈 즉석 우동집은 보통 튀김류(텐푸라)와 함께 오뎅을 팔기도 한다. 명란이나 토로로, 삶은 고기 같은 각종 토핑을 추가할 수 있고, 계절에 따라 샐러드 우동이나 카레우동, 중화식 짬뽕우동같은 메뉴도 볼 수 있다. 이것저것 많이 먹어봤지만, 병원을 다녀온 날에는 반드시 따뜻한 카케우동. 기본 육수에 파만 올린,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을 주문한다. 그리고 기분에 따라 튀김을 여러 개 집어 계산대로 향한다. 보통 토리텐(닭고기 튀김)과 고로케를 고른다. 기분이 좋을 땐 카키아게(새둥지 모양으로 뭉쳐서 튀겨낸 야채튀김)나 새우튀김을 고르기도 한다.
넓은 푸드코트, 점심시간으로 분주한 식당과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천천히 우동을 먹는다. 살짝만 빨아 당겨도 후루룩 하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버릴 만큼 탱탱한 우동면을, 입안에 넣고 아주 성실하게 꼭꼭 씹는다. 턱을 움직여 한번씩 씹을 때마다 의사 선생님께 했던 이야기들, 지난 한달간 있었던 일의 기억들이 닳아가는 형광등처럼 불안하게 반짝인다. 그러면 토리텐을 집어 와삭, 하고 크게 베어문다. 한달전의 나보다 지금의 나는 과연 더 성장했을까, 그런 심란한 생각이 들면 다시 젓가락을 들어 우동을 한 가락 고쳐 집는다. 
우동 그릇과 튀김 접시를 다 비우고 나면 허기는 간데없고 뱃속과 마음까지 따끈함만 남는다. 이마에 맺힌 땀을 냅킨으로 닦고 나면, 집으로 돌아갈 힘이 솟는다. 이제 집에 가자, 하고 그릇을 퇴식구에 돌려주고 나면 발걸음이 어쩐지 개운하다. 

 

도쿄도, 에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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