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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NUMBER_2022上/2022.봄.vol.03

첫, 처음 ③: 일본에서의 첫 '아르바이트/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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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그라피 : 타죠

원래 편의점은 이런 건가요?

일본에서의 첫 아르바이트는 내 인생의 첫 알바였다. 제일 만만한 게 편의점이라는 말을 듣고 세븐일레븐 편의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딱히 큰 이유는 없었고 직주근접을 강력하게 주장한 엄마의 의견에 따라, 당시 살던 기숙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골랐을 뿐이다. 


처음엔 나쁘지 않았다. 일도 어렵지 않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다 친절했다. 하지만 문제는 갈수록 조금씩 드러났다. 처음엔 근무자용 이름표를 발급해 준다고 했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 동네에서 거의 유일하게 있는 편의점의 저녁타임에 일했던 터라 손님을 물밀듯이 들어오는데, 알바생은 나 혼자였다. 심지어 젊은 독신 가구보다는 가족단위가 많은 주거단지가 밀집한 동네라 더욱 바빴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에 4일을 5시간씩 미칠듯이 몰려드는 손님들을 견디다 이사와 함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입니다. 제공: AC Photo


이사 후 새로운 동네에서 다시 세븐일레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알게 됐다. 그 매장이 유학생들이 일본의 노동환경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 일부러 이름표 발급을 안하고 견습생으로 처리해 낮은 시급을 받게 하거나 근무자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못 받게 하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한들 최저시급은 받고 일했으니 딱히 크게 불만은 없지만, 혼자서 끝없이 줄서는 손님들을 상대한 건 지금 돌이켜봐도 아찔한 기억이다.

 

도쿄도,냠


첫 직장, 써도 삼켰던 당시의 경험은 세월이 지나 지금을 뱉어냈어.

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인 2016년, 부산의 한 대학에서 졸업을 앞두고 있었던 스물 세 살의 나는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영어와 일본어 뿐이었던 문과 출신이, 딱히 이렇다 할 자격증 하나 없이 한국에서 취업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고, 앞 길이 천길 낭떠러지 마냥 아득하고 막막하게만 느껴졌던 그 때. 일본의 호텔에서 일할 기회가 있다는 소식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해외살이라는 선택지는 없었지만, 연일 이어지는 불합격 통보의 파도 속에서 그 소식은 구명구같았다.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면접에 임했고, 그 결과 사가현에 위치한 호텔로부터 내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 곳이 내 인생 첫 직장이 되었다. 첫 사회생활이자 첫 해외생활을 결심하기까지 많은 고민과 각오가 필요했지만 이렇게 잡은 기회를 흘려보낼 순 없었다. 그렇게 외국인의 신분으로 일본에 왔고 나의 첫 직장 첫 일본은 그렇게 시작됐다. 

일러스트 : 시농


 ‘씩씩하게 잘 해나가야지. 생활이야 자취 경험이 있으니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나의 큰 오산이었다. 당시의 생활을 지금 떠올려보면 과거의 내가 안쓰러울 정도로 힘든 나날이었다. 그 곳은 일본에서 흔히들 말하는 블랙기업이었던 것이다. 하루하루를 이 악물고 버텼다. ‘내가 더 잘하면 될거야. 오늘 혼난 것 내일은 고치자. 언젠가는 인정 받을거야.’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3개월을 버텼다. 때는 이윽고 12월이 되었고,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가슴 속에 품고만 다녔던 사직서를 제출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 했다. 주어진 시련에 결국 백기를 든 꼴이라 스스로에게도 많이 실망했다. 남들은 퇴사할 때 기분이 날아간다던데 난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 싶었는데, 그러한 일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다. 

처음 받았던 보너스(상여금).

 그 회사를 박차고 나온건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 그 때의 나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퇴사는 마음이 시키는 것. 잘했고 잘했고 또 잘했어.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고, 너는 그런 대우를 받을 재목이 아니야. 버텨줘서 고마워. 미래의 너는 훨씬 행복해. 그러니까 지지말고 화이팅.’ 이라고. 

 

카나가와 현,  Jeudi


치킨 냄새가 나는 유학생 생활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입니다. 제공: AC Photo

일본어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여러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퇴짜를 맞다가, 마지막으로 고른 것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일본 편의점은 음식도 만들어야 하고, 택배도 부치고 공공요금 수납도 하고, 한국 편의점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어지간하면 하고 싶지 않았지만 생활비가 바닥을 보이는 마당에 가릴 것은 없었다. 왜 그 매장을 골랐는지는 나도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일본어 학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주택가 근처의 패밀리마트로 갔다. 일본인 부부가 점장과 매니저로 경영하고 있는, 비교적 넓은 패밀리마트였고 일본어 학교의 유학생들을 많이 고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무섭고 말도 못 알아 듣겠고, 숫자도 못 읽겠고, 매일 울고만 싶었다. 하지만 점장님과 매니저님은 내가 일본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단순노동만 시키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전화를 받아보라거나, 메모를 적어서 다음 근무자에게 전달해보라는 등 일본어로 계속 말하고 쓰도록 격려해주셨다. 그리고 폐기된 식품을 매장 밖으로 반출하는 건 불법이지만 "뱃속에 넣어 가는 건 괜찮아"라며 근무자들이 먹을 수 있게 해주셨다. 고마운 마음에 일하다보니, 일본어 학교 시절 시작한 아르바이트를,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하기 직전까지 무려 3년 가까이 꾸준히 일했다.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입니다. 제공: AC Photo

주로 평일 오후 5시부터 일했기 때문에 출출한 직장인들이 주로 치킨과 핫도그를 사가곤 했다. 그래서 출근과 동시에 패밀리마트 치킨을 20장 정도 튀겨놓는 게 루틴이었다. 게다가 패밀리마트의 야키토리가 출시되던 역사적(?)인 시기를 겪기도 해서, 야키토리 80엔 세일 기간엔 계산대에 단 한번도 서지 않고 하루종일 야키토리만 만든 적도 있었다. 대망의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에는 내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인지 KFC의 직원인지도 모를 만큼 치킨을 튀기곤 했다. 

 

한동안 내 사복 티셔츠나 면 티에서는 늘 치킨 냄새가 났다. 학교 가방에도 유니폼을 넣어서 다녔으니 책에도 은은하게 기름 냄새가 뱄다. 그렇게 지겹도록 치킨을 튀겼으면서, 직장인이 된 지금도 출출하면 꼭 패밀리마트 치킨이 먹고 싶어진다. 패밀리마트 치킨에서는 점장님과 매니저님의 친절함이 곁들여진, 다사다난한 유학생 시절의 맛이 난다. 

 

도쿄도, 에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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