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형병원 정신의학과를 다닌 지 3년째가 되는 1월에 마지막 진료를 받고, 2개월 뒤 일본에 왔다. 나는 마지막 진료일에 한국의 정신과 의사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일본에 가면 지금의 상태는 우선 크게 나아질 겁니다. 지금 당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들이 모두 0으로 돌아가니까요. 하지만, 새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하면 또 새로운 우울과 스트레스가 생길 겁니다.” 그 말은 옳았고, 곧 일본의 심료 내과에 다니기 시작했다. 중간에 몇 번 병원을 옮기긴 했지만, 지금 다니고 있는 곳은 이사를 하고도 꾸준히 다니고 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일본인 의사는 내게 ‘너무 자신을 옥죄지 말아요.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가끔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는 그가 대충 좋은 말만 해주는 것 같아 진료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멀리서 통원하는 내게 늘 가장 마지막 진료 시간을 이용해 이야기를 오래도록 들어주고 있다. 일본의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일 것이기에, 침착하고 조곤조곤 대화하며 의사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다.
2019년 10월, 취업 내정을 받았다. 서른이 다 되어, 외국에서 신입사원이 됐다. 입사 전 신입 사원 교육을 받으며 점점 회사의 일에 흥미가 생겼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절대 뒤처지고 싶지 않았고, 정말 열심히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체력을 키우려고 12월부터 집 근처에 새로 오픈한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했다. 귀찮고 추워도 몸을 일으켜 일주일에 세 번은 꼭 피트니스 센터에 갔다. 운동복도 새로 샀고, 인터넷으로 운동기구의 사용법도 찾아보고, 나름의 운동 루틴도 짰다. 대충 먹던 편의점 도시락 대신 과일과 프로틴이 들어간 건강식품을 샀다. 점점 탄력이 붙는 다리와 늘어나는 폐활량이 느껴질 때마다 뿌듯했다. 졸업전시회를 준비하는 바쁜 와중에도 운동은 꾸준히 했고, 피부 관리도 틈틈이 했고 머리도 새로 했다. 그리고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봄 방학일지도 모를 3월에는 한국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들과 푹 쉴 계획도 착착 세웠다.
하지만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팬데믹 선언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물거품이 됐다. 우선은 피트니스 센터가 휴관에 들어갔다. 냈던 회비는 돌려받았지만, 늘 해오던 루틴이 망가진 것에 크게 좌절했다. 다들 집 안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진 탓인지, 사는 맨션에서 입주자 간에 층간소음으로 한바탕 소동이 있어서 관리회사가 입주민 전체에게 공지를 보냈다. 그 후 괜히 집안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하늘길이 막히고 해외 입국자들의 출입국 금지 조치가 떨어졌다. 한 달간 한국에서 느긋하게 지내며 몸과 마음을 충전할 생각이었지만, 한국에 간 지 하루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남은 봄방학은 모두 자가격리 기간으로 지나갔다. 종종 친구를 만나거나 하는 일은 있었지만, 휴지 대란과 마스크 부족 사태가 일어나자, 마스크를 아껴 써야 했기 때문에 정말로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입사 3주 만에 재택근무 명령이 내려왔다.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인데, 혼자서 덩그러니 집에 남겨졌다.
일본어 텍스트와 전화만으로 설명이 오가는 상황은 나에 게 큰 핸디캡이었다. 어떤 맥락에서 어떤 표정으로 이 말을 한 건 지 파악할 수 없어서, 상사들이 미숙한 나에게 화가 나 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일이 끝나도 개운치 않았고, 텍스트의 의미를 곱씹느라 잠 못 드는 밤이 계속됐다. 겨우 붙여뒀던 체력은 빠르게 사라졌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4개월 남짓한 긴 재택근무가 끝나고 출근이 시작됐지만 이미 내 건강 상태는 입사 전보다 훨씬 나빠져 있었다. 체중은 과하게 늘었고, 웃음은 줄었다. 회사 내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했고, 간단한 식사회가 몇 번 있었지만 다들 코로나19 이야기뿐이었다. 불안은 결국 내 발목을 잡았고, 연말에 이르러 업무 진행과 건강 상태 가 나빠져 결국 부서를 이동했다.
아마도 부서 이동 후의 어느 상담일이었다. 나는 의사의 앞에 닥치는 대로 슬픔을 좌르르 쏟아냈다. 운동도 일본어 공부도, 한국에 다녀오는 것도, 열심히 하려고 맘먹었던 회사 일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코로나 19를 무릅쓰고도 운동할 사람은 다 운동하고, 한국에 다녀올 사람은 다 다녀올 테고,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일 잘할 사람들은 다 잘할 것이다, 내가 바보같이 소심하니까 너무 과하게 불안을 느껴서, 바이러스가 무서워서, 혹은 그것을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결국 모든 걸 그르쳤다, 나는 단 하나도 해내지 못했다, 나의 나약함과 부족함과 한심함을 버틸 수가 없어서 하루하루가 괴롭다, 고. 의사는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우울을 키보드 자판으로 건져서 차트에 주섬주섬 옮겨 적었다. 그리고 불안의 바다에 잠겨 들어가는 나를 단 한마디의 말로 빠르게 건져냈다.
“모두,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참 너무한 얘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나 자신이 싫다. 왜 이런 나로 살아야 하나 싶고,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게 뭐냐는 질문에 나 자신이라고 대답한 적도 많다. 삶의 행운은 다 남 덕분이거나 운이 좋아서다. 그리고 불운은 나의 탓이자, 나의 부족함의 증거다. 왜냐면 나는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이므로, 뭔가 잘못됐다면 내가 실수했을 확률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의사는 이 사단이 난 내 생활을 듣고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피트니스 센터가 휴관한 것도, 재택근무가 시작된 것도, 한국에서 쉬지 못한 것도, 당신의 탓이 아니잖아요.”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버리고’라는 노래 가사가 있지만, 모든 슬픔을 내 탓이라 생각하는 건, 털어버리는 게 아니라 짊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훌훌 털기는커녕, 불행에 깔려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나는 슬픔을 쏟아내기를 멈추고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의사는 내가 꾸역꾸역 갖고 온 슬픔을, 책상 위의 먼지를 털듯 가볍게 쓸어냈다.
“보통은 사람이 환경을 만들고, 사람이 의지와 노력만 있으면 모든 걸 이뤄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환경이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큽니다. 정치 사회적 불안이나 전쟁, 자연재해, 간단하게는 낯선 동네로의 이사나 진학, 사소하게는 하루의 날씨도 그렇습니다.” 사소하게, 역까지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어느 날 비가 와 서 버스를 타고 역까지 갔다고 하자. 나는 ‘비 오는 날에 우비를 쓰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나는 그 사람들만큼 자전거를 잘 못 탈까. 자전거를 잘 타려는 의지가 부족한가 보다’라는 자책을 하는 사람이다. 의사는 그런 나를 너무나 잘 안다.
“... 바이러스를 무릅쓰고도 다 해내야 했다고 말했지만, 긴급 사태 선언 기간에 재택근무를 한 것도, 외출 자숙을 한 것도 잘못 이 아니에요. 게다가 모든 게 처음이었잖아요. 그러니 생각대로 잘 안 될 수 있는 게 당연합니다. 지금은 모두가 변화에 당황하고 있으니 ‘나만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이렇게 혼란한 시기일수록, 힘내서 하루를 견디고 있는 자신을 좀 더 챙기고 격려해주세요.”
진료실을 나오며 생각했다. 흔히 삶은 자동차 여행이고 내가 운전대를 잡고 조종해 자유롭게 길을 선택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비유하지만, 어쩌면 삶이란 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아주 작고 하찮은 해파리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내게 물어봤다. 파도에 흔들리는 것이 과연 해파리의 잘못인지. 대답은 ‘그건 아닐걸’였다. 분명 큰 흐름인 해류를 따라 목적과 규칙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긴 하다. 그러나 조금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매 순간 변하는 파도에 힘없이 휩쓸려 갈팡질팡하는 하루들로 채워져 있다. 암만 발버둥 쳐도 거대한 대양 앞에서는 그저 떠 있기나 하는 게 고작이고, 이따금 큰 고래라도 지나가면 나가떨어지기도 하고, 천적이라도 보이면 힘껏 도망도 쳐야 한다.
그런 해파리 주제에 바다를 다 짊어지려다가는, 깊이 가라앉아 죽고 말 것이다. 어디까지나 제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깊이까지만 헤엄쳐 들어가야 한다. 물살이 거세면 온몸의 힘을 모두 빼고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할 때도 필요할 것이다. 생존하려면 말이다. 해파리의 삶은 예측할 수 없이 휘둘리고 뒤집히지만, 그러다 보면 예상 밖의 일로 잔잔해질 때도 있을 것이다.
바다 위에서 살면 당연히 늘 불안하긴 하겠지만, 파도는 바다의 탓이다.
도쿄도, 에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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