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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NUMBER_2022下/2022.가을.vol.05

[일본생활]입욕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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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과 우울에 찌든 직장인을, 입욕제를 푼 뜨거운 물에 넣고 20~30분 정도 삶아줍니다.  

 

 

날이 추워지면 슬슬 걱정이 됩니다. 물리적으로는, 추위를 느끼면 몸을 움츠리는 일이 많아 근육이 뭉치기도 쉽고, 피하 지방이 마치 식은 소고깃국의 위에 뜬 지방처럼 굳어서 체질이 차가워지기도 쉽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항시 우울을 반려하고 있는 사람인지라, 날씨가 쌀쌀해지고 해가 짧아지면 쉽게 우울해집니다. 작은 일에도 쉽게 우울해지고, 그것이 오래갑니다.

 

추우면 그저 전기장판과 이불 사이로 쏙 들어가, 가만히 있고만 싶습니다. 요즘 세상엔 스마트폰과 전기만 있으면, 하루 종일 가만히 있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욱, 이 ‘가만함’을 비집고 우울이 잘 스며듭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추운 날을 살기 위해 이불 밖으로 나갈 아주 작은 이유들을,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빵조각을 떼어 길에 뿌려놓듯 촘촘히 만들어 둡니다. 빵조각의 끝에는 편안함이 있으리라 믿으면서. 우선은 그간 뿌려놨던 빵조각들을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처음은 산책. 슬리퍼를 끌고 나가 집 근처를 한 바퀴 돕니다. 그러면 고민거리가 제법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겨울엔 잘 안됩니다. 밤 산책은 때때로 위험하기도 합니다. 그다음에 찾아낸 방법은 샤워입니다. 디자인 전문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애용한 방법입니다. 아무리 모니터를 노려봐도 도저히 과제에 진척이 없으면, 일단 옷부터 벗어던졌습니다. 뜨끈한 수증기와 함께 집 전체에 샤워젤 향기가 돌고, 기분이 상쾌해지면 으레 과제도 잘 됩니다. 그러나 회사생활 2년 차에 접어들자 산책과 샤워로도 우울함이 씻겨나가지 않는 현상을 경험하고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입니다. 출처 : AC photo

 

외국에서 일하는 회사원의 삶에는 유학생의 삶과는 차원이 다른 결의 고통, 그리고 더 끈적하고 집요한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회사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의 첫 회사는 너무나 바쁘고 규율도 엄격한 회사였습니다. 유학생 때보다 금전적으로는 넉넉할지언정 시간적 여유는 조금도 없다는 사실이 최악이었습니다. 명령, 지시, 마감이 나를 쥐어짜는 와중에 야근까지 겹치면, 집에 오자마자 씻고 자는 것이 고작입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에 귀가한 어느 날 밤엔 머리를 감다가 울었습니다. 1분이라도 빨리 침대에 누워야만 하는데,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 목욕에 시간이 더 걸린다는 사실이 그렇게 서러울 줄은 몰랐습니다. 주말에는 시체처럼 잠만 잤고, 나무늘보처럼 방 안을 기어 다녔습니다. 찌든 기름때처럼 단단히 달라붙은 우울은 씻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겐 시간도 기력도 없었고, 빨리 당장의 스트레스를 잊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음주나 야식 먹기 등으로 스트레스와 크게 다퉜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숙취와 소화불량만이 남았습니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은 바로 입욕이었습니다. 격무로 근육통에 시달리던 룸메이트가 ‘오늘은 뜨거운 물을 받아 입욕을 하고 싶으니, 욕실을 오래 쓸 것 같다’며, 욕실 사용에 양해를 구했습니다. 심드렁하게 누워만 있던 저는, 욕실에서 걸어 나오는 룸메이트의 ‘캬~’하는 밝은 감탄사에 몸을 일으켰습니다. 약 30분~40분 정도 입욕을 하고 나온 룸메이트의 표정이 정말로 가뿐해 보였습니다. 어깨 결림이 많이 사라졌다며 좋아하는 룸메이트의 목소리를 듣자, '나도 해볼래'라는 마음이 싹텄습니다. 

 

기왕 다량의 물을 받아 쓸 거라면, 입욕제도 넣어보자는 생각에 근처의 드럭스토어로 향했습니다. 입욕과 온천 문화가 발달한 일본답게 입욕제는 엄청나게 다양했고, 그 효과와 향기도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오이타 여행에서 만났던 노천 온천의 향기를 떠올리며, 일본 각지의 온천 명소의 감수를 받았다는 입욕제 세트를 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보일러를 틀고,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던 욕조의 마개를 닫았습니다. 뚜껑이 있는 텀블러에 얼음물도 가득 담아 준비했습니다. 썰렁한 집에 모처럼 난방을 틀었습니다. 냉큼 옷을 벗고, 욕조 밖에서 간단히 샤워를 했습니다. 머리는 틀어 올려 타월로 감쌌습니다. 방수 비닐팩에 100퍼센트 충전한 스마트폰을 넣고 아무 유튜브 영상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홋카이도의 노보리베츠 온천의 향기를 담았다는 입욕제의 봉투를 뜯었습니다. 

 

준비물 : 입욕제 / 타올 2장 / 마실 물 / 방수팩에 담은 스마트폰 / 스마트폰 거치대 등

노보리베츠의 입욕제는 아주 성공적인 선택이었으므로, 노천온천의 향기를 원하시는 분들께는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일본 가정집의 욕실 가득 퍼지는, 나무 숲 속과 눈을 맞은 흙냄새가 섞인 듯한 향기에 심호흡을 하고 싶어 집니다. 욕실의 문은 살짝 열어 둡니다. 고온의 증기가 욕실에 가득 차면 앞이 잘 보이지 않거나 어지러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짝 찬 기운이 들어오면 정말 노천온천 기분이 납니다!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아보세요) 욕조는 작지만 저의 키는 더 작기 때문에, 기역자로 앉자 가슴께까지 물이 찹니다. 그럼 다리를 굽히고, 목까지 몸을 쭉 담급니다. 그윽한 입욕제의 향기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온몸의 곳곳으로 스며듭니다. 물의 온도가 너무 높으면 가슴이 갑갑해지는 기분이 들 수 있습니다. 마련해둔 텀블러의 얼음물을 마셨습니다. 수분을 보충해주면 몇 분을 더 앉아있을 수 있습니다. 

 

막상 물에 들어오면 할 일은 없습니다. 그저 이 온기를 즐기는 것뿐.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틀거나 게임을 합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전자상가를 갔을 때 ‘욕조에서도 볼 수 있는 미니 액정 텔레비전’을 파는 걸 보고 ‘왜 욕조에서까지 텔레비전을 보려고 할까?’라고 의아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텔레비전의 존재를 굉장히 납득하고 있습니다.


찰박찰박하는 물소리를 ASMR삼아 열심히 몸을 삶아(?) 줍니다. 다리와 손발, 관절을 구부렸다 폈다 해보기도 하고 종아리나 팔, 무릎 뒤나 겨드랑이 등 관절과 림프선이 지나가는 곳들을 꾹꾹 눌러 마사지하면 더 좋습니다. 저는 물속에서 손목과 발목 운동을 꼭 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결림이 심하던 부분을 뜨거운 물에 푹 담가줍니다. 저의 경우는 어깨와 목이기 때문에, 목까지 물에 담그다 보니 늘 입욕 후엔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타월이 축축해집니다.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입니다. 출처 : AC photo

 

온몸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녹아 사라지는 느낌’을 겪어보신 적 있나요. 마치 물감이 물에 풀려나가듯, 천천히 부드럽게 몸 곳곳이 따뜻해집니다. 피부에 점점 붉은색이 돕니다. 혈관을 따라 피가 빠르게 흐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주 추운 야외에서 활동한 뒤에, 따뜻한 김이 폴폴 나는 진한 차(또는 오뎅국물이나 라면 국물 같은 것들)를 마시는 상상을 해봅시다. 식도를 타고 위로 흘러들어 간 따뜻함이 뱃속으로 퍼지고, 저절로 입에서는 ‘하아-’하는, 안도감과 아늑함이 가득한 숨이 터져 나오지요. 그것이 몸속의 장기뿐만 아니라 피부와 근육, 손가락과 발가락 끝까지 꼼꼼하고 넓게 퍼져나가는 느낌이라 생각하면 와닿으실까요.

 

심장이 힘차게 운동하고, 몸 전체에 활기가 전해집니다. 불편했던 체기도 금세 내려가, 한 15분이 지나자 꺼루룩, 하고 트림이 나오더군요. 나무토막같이 누워만 있었던 낮에 비하면, 이런 세포들의 움직임은 사뭇 맹렬하기까지 합니다. 귀를 잘 기울이면 피가 흐르고 장기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마치 봉인되어 있던 힘을 깨달은 만화 주인공의 기분이 이런 걸까요. 물속에서 나오면 당장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아 올라서, 스스로도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당황해하면서도 즐거웠습니다.

 


 

입욕의 경험은 정말 짜릿하고 즐거웠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깨끗함을 유지해야 하는 속옷이나 흰 의류, 면으로 된 옷들, 혹은 찌든 때가 빠지지 않는 의류들을 ‘삶은 빨래’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입욕 후의 상쾌함은, 나의 몸과 마음을 제대로 ‘삶은 빨래’한 기분이었습니다. 뜨거운 물에 푹푹 삶아, 찌든 때를 말끔히 뺀, 새것처럼 깨끗해진 빨래가 된 것 같았습니다.

 

가장 괴로웠던 직장인 2년 차의 가을과 겨울은, 작은 욕조와 입욕제 덕분에 무사히 넘겼습니다. 그 후로는 계절에 상관없이, 기분이 딱딱하게 엉키는 날에는 어김없이 뜨거운 물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입욕을 즐길지를 궁리하면서요. 저는 때 목욕도 정말 좋아하는데, 체력이 허락하는 날에는 입욕 후에 때도 밀었습니다. 그러면 일본 노천온천과 더불어,  냉장고에 뚱뚱한 바나나 우유와 피크닉이 있을 것만 같은 한국 대중탕의 개운한 기분까지 만끽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때 장갑 이야기는 지난 겨울호에서 쓴 바가 있으니,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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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데우는 일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만날 새로운 우울을 마주하고 제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친숙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훗날 내 인생에 더 강력한 우울이 찾아온다 해도, 자연스레 입욕을 하면서 대처방법을 고민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입욕도 내가 행복으로 향하는 길을 잃지 않도록 흘려놓은 수많은 빵조각 중에 하나라 언젠간 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한동안 계속 그 자리를 지켜줄 가장 크고 묵직한 빵조각일 것입니다. 

 

 

한국은 입욕보다는 샤워가 대중적이라, 한국에 살 땐 늘 샤워부스 형태의 욕실을 사용해왔습니다. 대조적으로, 아무리 작고 오래된 집이어도 일본은 꼭 욕조가 있지요. 일본에 처음 왔을 땐 관리하기 버거운 욕조가 있는 일본의 욕실을 늘 불편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입욕을 즐기기엔 더없이 좋은 환경인 것을, 저는 일본에 와서 5년이 지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드럭스토어에 가면, 약용 성분이 가득 든 배스 솔트, 탄산과 거품이 일어나는 입욕제 등 각양각색의 입욕제가 가득합니다. 모처럼 입욕 문화가 대중적인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다면, 그리고 여태껏 입욕을 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한 번쯤 물을 채워 몸을 담가보는 건 어떨까요. 올 가을과 겨울에는 입욕을 취미로 해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미처 다 떨쳐내지 못한, 진득하게 붙어있던 피로와 슬픔을 깨끗이 떼어내는 멋진 시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글 : 도쿄도, 에이타
일러스트 : 시농 (@chi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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