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EW/일본에서 그래픽디자인 하기

일본에서 그래픽디자인 하기 2화 : 서체의 탄생

728x90

 

일본에서 그래픽디자인 하기 2화 : 서체의 탄생

 

1화에서 세로 쓰기 이야기를 잠시 다뤘습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는 세로 쓰기의 사용이 자유롭고, 특히 일본어는 일본 사회에서도 세로 쓰기가 매우 일반적임을 소개했습니다. 일본은 편지 봉투, 서류 봉투를 쓰는 법도 세로 쓰기가 기본이라, 생활하는 과정에서 이것에 적응하는 것도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또한 일본에서의 그래픽디자인 공부나 업무를 위해서는 어도비 인디자인의 CJK판 사용을 권장하는 이야기를 잠깐 했었습니다. 영문판 인디자인에서는 세로쓰기세로 쓰기 기능을 거의 지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인즉슨 영어권 사용자가 영어 문장을 조판하는 과정에서는 세로 쓰기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여러 가지 이유와 유래가 있습니다만, 글자의 제작 과정에서 하나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간단하고 알기 쉬운 만화를 준비했습니다. 

01234

좌우로 넘겨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한글, 한자, 가나는 면으로부터, 알파벳은 선으로부터.

한글, 한자, 가나 모두 이 정사각형의 공간 안에서 글자의 모양을 짭니다. 이 안에서 어떻게, 어떤 글자를 설계하느냐가 한중일 삼국의 서체 디자인의 시작입니다. 일본에서 그래픽 디자인 일을 하다보면, 일본어 문장 중간에 영문이 섞어 디자인해야 하는 일도 종종 생깁니다. 그래서 알파벳을 다루는 방법과 알파벳의 특징도 조금 짚어보았습니다.

 

영어 타이포 그래피는 ‘선(라인)’에서 태어납니다. 알파벳은 직선과 곡선과 점이, 줄을 맞춰 늘어서서 단어를 구성하고 문장을 만듭니다.  소문자 제이나 에프, 지, 대문자 아이 등을 생각해봅시다. 이 차이는 알파벳의 금속활자를 보면 더욱 이해하기 쉽습니다. 결론은, 한글과 한자와 가나는 면에,  영문은 선(특히 수평선)에 기반하는 글자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가장 알기 좋은 예로는, '영어를 세로쓰기해보는 '입니다. 대문자의 세로쓰기는 가끔 있습니다만, 이번엔 대소문자가 섞인 어떤 단어를 세로로 정렬한다고 상상해봅시다. 가독성의 면에서도, 디자인의 심미적인 부분에서도 대단히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래서 영미권의 디자이너들은 세로로 공간에 영문을 배치할 때에는 ①비교적 중앙정렬이 쉬운 대문자로 쓰거나 ②아예 텍스트 상자 자체를 눕혀버리거나, ③가독성에 문제가 없다면 촘촘하게 행갈이를 하거나 ④장평을 극단적으로 조절해 어떻게든 가로쓰기를 유지하는 방향을 택하는 것 같습니다. 

왼쪽 : 월간 코믹진(카도카와 출판)의 「殺し愛(코로시아이/ 한국 번역명 '살애')」. 일문 제목과 영문 제목, 작가의 필명(영문)을 조화롭게 배치 / 왼쪽 : 월간 하나토유메(하쿠센샤)의 「嘘解きレトリック(우소토키레토릭). 캐치카피의 영문을 대문자로 세로쓰기 배치했다.

특히 게임, 만화, 라이트노벨 등 서브컬처에 관한 디자인 작업을 많이 하는 분들, 또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렇게 가로 세로로 마구 날아다니는 일본어와 영어와 한자의 수라장(...)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자면(字面)

 

일본어 타이포그래피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면(字面:じずら, 지즈라)'에 대해 알아봅시다. 일본어 사전에서는, '글씨의 모양, 글씨의 모양이 주는 느낌, 또는 어구나 문장이 표면적으로 지시하는 의미'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 싶은 '자면'의 의미는 조금 더 좁은 의미의 것으로 '활자에 새겨져 있는 글자의 표면'을 뜻합니다. 즉, 글자의 획이 다다르는 곳에 선을 그어 만든 사각형의 공간을 자면이라고 합니다. 

아래의 도면 중 왼쪽을 봅시다. 글자가 빼곡히 들어찬 하늘색 선의 네모칸이 바로 자면입니다. 그리고 자면의 바깥에 있는 검은 선의 네모칸을 '가상 바디(仮想ボディー)’라고 합니다. 가상 바디에 대해선 많은 걸 찾지 못했지만, 활자와 활자끼리 들러붙어 찍히지 않도록 설정한 여유 공간이라고 합니다. 자면은 가상 바디 안에서 정해지는데, 서체에 따라 자면이 가상 바디의 끝까지 확장되기도 하고, 가상바디에 비해 아주 작은 자면을 갖기도 합니다. 아래의 도면에 제시된 두 서체인 見出し ゴシック MB31(미다시고딕 MB31), 新ゴシック(신고딕. 줄여서 신고라고 부른다.) 은 자면의 활용에 따라 달라지는 서체의 인상을 잘 보여줍니다. 둘 다 일본 출판계에서 주로 타이틀이나 대제목에 애용되는 고딕체이지만, 주는 인상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출처 : 모리사와 디자인(앞으로 많이 이야기할 예정입니다)

 

자면이 모여 문장이 되고, 인상이 된다

자면 안에서 만들어지는 글자의 인상이, 문장의 전체의 인상과 페이지의 인상을 결정하고, 가독성과 실용성까지 결정합니다. 예를 들면, 타이틀로 주로 사용되는 고딕체들은 자면을 넓게 쓰는, 획이 굵고 큰 글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잡지의 본문에 사용되는 고딕체들은 자면이 작고 한자와 가나 간의 크기가 차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딕 서체 중에서 본문에 널리 애용되는 ゴシック MB101시리즈가 그렇습니다.  긴 문장을 읽어도 눈이 아프지 않고, 독자가 독서에 심취하기에 좋습니다. 

왼쪽 :ゴシックMB101시리즈. 한자의 획에도 곡선과 삐침을 살려 감각적이고, 가나가 한자보다 자면이 약간 작은 듯한 인상을 줍니다. / 오른쪽 : 위에서 언급한 신고딕입니다. 가나도 한자도 자면 면면을 호방하게 채운 스타일로, 획이 얇아도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위의 자료보다 더 알기 쉬울 것 같아서, 이번에는 폰트웍스라는 회사의 인기 있는 고딕체를 가져왔습니다. 폰트웍스의 筑紫(츠쿠시) 시리즈의 '츠쿠시 올드 고딕'입니다. 위에서 예를 들었던 고딕체들보다 자면의 차이가 확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자나 다른 가나에 비해 ミ, き, く, う, し의 자면은 세로로 질고 홀쭉한 편이고, い는 확연히 좌우로 넓고 납작한 자면으로 제작됐습니다. 이런 가나가 한자와 함께 문장을 이룰 때, 글자의 인상으로 인해 시각적으로 강약의 리듬이 생깁니다. 서체를 어떻게 고르느냐에 따라, 문장과 지면 전체에 감성을 더해줄 수도 있습니다. 

 

폰트웍스의 역작 츠쿠시 시리즈의, 츠쿠시 올드 고딕. 라이트노벨부터 실용서적, 여성 잡지에까지 폭넓게 사랑받는 폰트입니다.

 

오늘은 다소 딱딱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본에서 타이포그래피나 조판 작업을 할 때 필요한 스킬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초석을 까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체 회사(메이커)의 이야기는 특히 처음 들으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다음 화에서는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서체제작 회사인 모리사와와 폰트웍스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유명한 서체와 인기 있는 서체, 특이한 모습의 장식체들을 두루 살펴보려고 합니다. 

 

 

 

글 : 도쿄도, 에이타

일러스트 : 시농 (instagram.com/chi_nonnon)


지난 글 읽기

2023.07.03 - [NEW/일본에서 그래픽디자인 하기] - 일본에서 그래픽 디자인 하기 1화 : 세로로 읽고 쓰기

 

일본에서 그래픽 디자인 하기 1화 : 세로로 읽고 쓰기

일본에서 그래픽 디자인 하기 1화 : 세로로 쓰고 읽기 일본에서 그래픽 디자인 일을 하면서, ‘서체’를 잘 사용하는 것은 외국인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꽤 난해하고도 괴롭지만 흥미로운 일입니

quarterly-iut.tistory.com

2023.06.01 - [NEW/일본에서 그래픽디자인 하기] - 일본에서 그래픽디자인 하기 : 프롤로그

 

일본에서 그래픽디자인 하기 : 프롤로그

일본의 디자인, 또는 디자인에 대해 논하기엔 아직 새파란 신입입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달고 밥벌이를 한 지 이제 갓 3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명함에 ‘디자인 팀’ 또는 ‘디자

quarterly-iut.tistory.com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