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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NUMBER_2022下/2022.여름.vol.04

[일본문화]여름의 특별한 선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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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부채라는 선물

쥘부채의 기원은 일본이라고 한다. 헤이안(平安) 시대 처음 세상에 등장해 현대의 일본까지 이어지고 있는,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토산품일 쥘부채를, 여름이 되면 엄마에게 보내는 일을 매년 의식처럼 했었다. 시작은 다니던 대학의 산학협력 프로젝트로 에도(江戸) 부채를 만든 그 해의 여름부터. 도쿄의 장인과 함께 만든 그 부채를 엄마에게 보냈다.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입니다. 제공: AC Photo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더운 도시, 대구 출신인 엄마는 유독 여름에 약했다. 프로젝트로 만든 작품을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야 더 잘 써줄 사람에게 보냈으니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선선해지는 여름 끝물이 되면 그간 잘 쓰던 쥘부채를 늘 잃어버리셨다. 그 후로 날이 더워지면 자연스레 엄마를 위해 부채를 파는 매대를 돌아보게 됐다.


끝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형태의 쥘부채를 선물하는 것은, 영원의 행복과 온갖 화로부터 몸을 지켜주는 부적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영원은 너무 무겁고, 온갖 화는 과분하다. 그저 이번 여름도 더위로부터 엄마를 지켜주세요, 이 하나만 바라고 쥘부채를 또 포장했던, 십여 년 간의 여름 이야기.


백중 : 여름의 마음

'중원(お中元:おちゅうげん.한국에서는 보통 '백중'이라 한다.)'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입사 첫 해에 맞이한 여름의 일이다. 거래처에 보낼 선물을 사야 한다며, 회사 총무님의 부탁으로 동기와 함께 도쿄 다이마루 백화점에 갔다. 뭔지는 몰라도 마치 크리스마스를 방불케 할 만큼 화려하고 정성스러운 선물들이 즐비했다. 유명 초콜릿 브랜드 고디바(GODIVA)는 여름 선물용 패키지 한정 초코무스 푸딩 세트를 선보이고 있었고, 이름만 간간히 들었던 고급 화과자점인 토라야(とらや)에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양손 가득 선물용 과자를 사는 일이 '업무상 외출'로  처리된 건 그만큼 중원을 지내는 것이 중요하단 뜻이겠지. 그래서 그날의 외근 후, 중원에 대해 찾아보았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시작은 도교에서 유래된 풍습으로, 지금처럼 선물을 보내는 것은 에도 시대부터 유래된 관습이라고 한다. 그동안 신세를 진 사람들, 주로 친척이나 웃어른에게 보내고,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보통 거래처에 보낸다.(내가 다니는 회사는 수주회사라 백중에 챙길 것이 아주 많다...)

 

굳이 일본의 명절을 나도 경험해봐야겠단 생각도 없었고, 단지 형형색색의 과자 패키지와 고급 백화점읠 브로슈어와 디스플레이를 보는 게 재밌었을 뿐이었지만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야마구치 현에 계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사촌 형제인 당숙 어르신. 재일교포로, 거의 한국어를 하시지 못하신다. 매년 설날 한국에 전화를 거시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일본어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었지만 돌아가신 후로는 한국 가족들 중에선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서로 목소리만 듣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은 것이 10년. 내가 일본에 온 이후로는 내가 매년 연말연시에 전화를 드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반가우신지, 1년 치 이야기를 한 번에 다 몰아서 하시면서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안부를 물으며 기뻐하셨다. 내가 전문학교를 졸업했을 땐 졸업 선물이라며 나를 야마구치로 초대해서, 직접 차를 몰아 구마모토 현과 오이타현을 구경시켜주셨고 사회인이 됐으니 옷도 사입고 잘 먹고 지내라며 용돈도 챙겨주셨었다. 

 

이제 나도 직장인이 되었고,  연말연시 뿐만 아니라 좀 더 자주 안부를 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회사 외근 때 챙겨둔 백화점 브로슈어를 뒤져 처음으로 중원 선물이란 걸 찾아봤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많은 브랜드와 선물 종류 중에서,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며칠을 머리를 감싸고 고민한 결과, 그날 도쿄 다이마루 백화점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던 토라야의 양갱과 모나카 세트를 골랐다. 그리고 동네 쇼핑센터의 로프트(LOFT)에 가서 금붕어와 불꽃놀이가 그려진 편지지를 사 편지도 꼭꼭 눌러썼다. 반년 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반년 간 별 일은 없으신지를 묻는 편지는 자꾸만 길어져서, 글씨도 저절로 작아졌다. 80이 다 되어가는 어르신이 과연 읽으실 수 있으실까.

 

일본의 백중은 지역별로 조금씩 시기가 다른데, 대략적인 기간이지만 도쿄를 포함한 관동은 보통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남부로 갈수록 기간이 늦어져서 야마구치현이 속한 쥬고쿠, 그리고 큐슈 지역은 8월 초 까지다. 그래서 정확히 8월 첫 주 토요일 아침에 선물이 어르신 댁에 도착할 수 있도록 꼼꼼히 택배 전표를 눌러썼다. 그리고 8월 1일, 어르신에게서 전화가 왔다. 편지도 다 읽으셨고, 이런 좋은 선물을 보내 주어서 고맙다고 기뻐하셨다. 한국의 가족들과 일본의 어르신을 이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면 괜히 가슴 한편이 찡해진다.

 

올 여름은 어떤 멋진 선물을 보낼까. 편지엔 어떤 이야기를 쓸까. 올해도 올 여름의 마음을 잘 다듬어 보내야지.

 

도쿄도, 에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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